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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사상전향제도의 역사


전향은 “권력의 강제로 말미암은 사상의 변화”로 정의된다.

일제치하 1925년에 만들어진 치안유지법은 공산주의운동 등 진보적 사회운동뿐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리고 36년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에 의해 보호관찰소를 설치하고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사상전향의 강요가 이루어졌다.

일본의 패전이후 공식적으로는 전향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친일세력이 재등장하면서 미군정 포고령에 의해 검거된 좌익수들은 무지막지한 고문과 함께, ‘탈퇴’나 ‘탈당’이라는 형태로 사상전향을 강요받았다.

한국전쟁중에는 역시 탈당 혹은 투항이라는 이름의 사실상의 전향강요가 있었으나 형이 확정된 좌익수에게 형무소에서 전향을 강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얼어죽고 굶어죽고 맞아죽는 형무소의 일상 그 자체가 일상적으로 변절을 강요하는 고문현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휴전협정 성립 이후 몇 개 형무소에서 좌익의 지도급 위치에 있었던 정치범에게 ‘진술서’ ‘자서전’이라는 이름의 전향서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또한 형무소 당국이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에의 충성여부를 묻는 사상동태조사를 실시, 그 대답에 따라 전향과 비전향으로 분류했다.

‘전향’이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56년부터였다. 이는 법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법무부장관의 훈령에 의한 것이었다.

4․19 직후 비전향 좌익수들이 사면 석방된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5․16 직후에 당국은 전국의 비전향 좌익수를 대전교도소에 집결 수용했는데, 이때의 수가 모두 800명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73-74년 전국에서 감행된 살인적 고문과정을 거쳐 비전향 좌익수의 수는 2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시 정부가 상당히 높은 정책수준에서 전향공작 전담반을 구성하고, 몇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전향을 강요하며 고문을 했던 것은 이 때가 좌익수들의 만기출소가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70년 중반까지의 전향공작은 좌익수들에게 상당히 높은 수준(대북비판 등)의 전향을 요구했으나, 이후 반유신투쟁이 거세지면서 지식인들의 구속이 늘자 전향의 내용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어 최근까지는 ‘준법서약’ 수준의 내용만으로도 전향을 인정해 왔다. 그리고 98년 7월 1일 정부는 전향제도를 ‘준법서약제도’로 대체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