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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공포로부터의 자유, 인권의 출발

지난 달부터 1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 그는 부산에서 러시아 문학을 강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박사학위를 갖고 있으므로 상당한 지적 수준을 가진 사람이다. 시와 편지쓰기를 좋아하고, 아내와 딸, 아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정신병원을 세번이나 드나들었고, 대학 강의를 하고 있는 지금도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안기부에 의해 감시당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내와 딸마저 자신의 적인 안기부에 포섭되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교 공부를 했고, 지금은 왠만큼 자신이 있다고까지 말했다.


정신병원을 드나든 대학강사

인권단체의 활동가들은 이와 비슷한 증세를 가진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한다. 안기부로 대표되는 정보기관이 자신을 감시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죽고 싶다는 그들은 꽤나 귀찮은 존재다. 때로는 매정하게 내치기도 한다.

그들은 대부분 정보기관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무슨 지하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정보기관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은 실제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각하다.

문제는 '오해'로부터 기인한 이런 정신적인 공포가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있다. 한 정신과 의사는 이런 과대피해망상증 환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고 말한다. 이승만 정권 때는 특무대였고, 박정희 정권 때는 중앙정보부였으며, 안기부로 이름이 바뀐 다음에는 안기부가 그 대표적인 기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 정신과 치료나 받으라고 말할 수도 없다. 원인은 분명 이 사회에 공포를 조장하고 그 공포로 이 사회를 지배하려는 사람들과 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공할 공포의 원인 제공자가 바뀌지 않는 한 이런 터무니없는 피해자들은 계속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고문의 대명사인 물고문이나 전기고문을 당했다는 주장들이 이어져 왔고,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조차 있지 않는가. 도청과 협박, 감시, 미행 등등 음울한 행위들이 정보기구라는 이유만으로 합법화되고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는다면, 그 공포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안기부의 존재는 정치인이나 운동권 인사들에게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안기부를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상황이 사실 더 큰 문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이런 말을 하면 안기부에 잡혀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은연중 국민들 속에 유포되어 있는 것이다.


공포가 지배하는 사회

최근 안기부의 북풍공작이 연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으며, 창설 이래 가장 큰 폭의 개혁이 이뤄질 것이라고 점쳐지고 있다. 지난해에 일어났던 정권의 재창출을 위한 공작이 북한과의 커넥션 속에 이루어졌고, 안기부장이 직접 이를 지휘했다는 일 등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또한, 수사를 받던 안기부장이 자해를 해 입원하는 일로 이 문제는 더욱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일들은 정보기관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완전히 벗어나 안기부가 심지어는 국민의 가장 신성한 권리인 정치참여권만저 왜곡시키려 했던 것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최근 정부가 추진하려는 안기부의 축소 개편 방향은 정당하다.

그럼에도 현재의 안기부의 개혁 추진 방향은 미흡하다. 과거 안기부가 자행한 온갖 불법적인 인권유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안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고문과 밀실수사를 통해 자행했던 인권유린에 대해서 국민 앞에 사죄하는 일, 이후에는 다시는 그런 불법 인권유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와 함께 과거 고문으로 조작한 간첩사건들의 진상을 밝히고, 국가는 그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며,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 뿐만이 아니라 가해자들, 가령 정형근 의원과 같은 이들은 명확한 조사를 거쳐 공직에서 추방하고 처벌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이뤄진 정보수집을 통해 축적해놓은 개인들의 '정보파일'을 모두 파기해야 할 것이며, 다시는 그런 정보수집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다시는 안기부가 불법행위를 자행하지 못하도록 국회 정보위원회를 강화하고, 그 예산도 정확히 심의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안기부법의 개정을 통한 안기부의 수사권을 박탈해야 한다.


미흡한 안기부 개혁논의

공포가 지배하고, 공포가 재현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로 발전할 수 없다.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존재할 때만이 공포는 사라진다. 안기부의 개편 방향은 이처럼 의사표현의 자유를 전면적으로 보장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이다. 그럴 때 임채희 씨와 같은 무형의 피해자도 줄어들 것이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세계인권선언은 그 전문에서 '결핍과 공포로부의 자유'를 천명하고 있다. 인권의 적(適)인 공포를 통치수단으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 이 일은 50년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을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