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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시평> 분노와 사랑의 슬픔


언젠가 아이들에게 김민기가 만든 '백구'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 노래는 어른 양희은이 아닌, 어린 이지윤이 7분 5초에 걸쳐 느리게 부른 것이었다. 의자에 기대어 듣고 있던 광민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길을 건너던 백구가 커다란 트럭에 치어 죽고, 그 백구를 안고 뒷동산을 헤매다 빨갛게 핀 맨드라미 옆에 묻는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인 것 같았다.

눈물은 어린 가슴에 일어난 슬픔의 결과다. 그 슬픔은 직접적으로는 가족처럼 지내던 개의 죽음, 즉 한 존재의 상실로 인한 아픔 때문이다. 그러나 더 깊게 보면, 그 이면에는 비정한 트럭운전사의 배신적 행위가 자리잡고 있다. 부주의한 트럭운전사는 차에 치인 개의 친구인 아이에게 닥칠 슬픔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굳이 예링이나 마이호퍼의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트럭운전사가 침해한 것은 아이의 개에 대한 '소유권'이 아니라 아이 자신의 '인격'이란 말이다.


근본적으로 인권을 무시하는 현실

타인의 어떤 행위로 인하여 생겨나는 슬픔은, 그 행위의 일차적인 결과라기보다는 그 행위가 상대방의 인격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오늘 얘기하려는 슬픔은 이런 종류의 슬픔이다.

"인권이 무엇이냐는 물음 이전에 이 땅에서 인권이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권운동을 중단할 수 없다. 그것이 인권운동가의 슬픔이다." 다시 감옥에 갇히기 전 그가 하던 말이다. 인권운동가의 슬픔도, 인권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현실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한 침해는 개인들 사이에서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횡포로 나타나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폭력의 경우다. 더군다나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공권력이 개인의 인격성을 마음대로 처리하고자 할 때의 슬픔이란 분노에 가까운 것이 되고만다.

며칠 후부터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된다. 공소장을 읽다보면 처음부터 걸린다. 검사는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쓰고 있다. "인권운동을 한답시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재야인사들과 접촉하는 등 '현행국법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자'인 바"….

그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치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인권운동에 전념하여 어느 누구도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물론 법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가 부분적으로 맞서 싸우는 대상은 적어도 위헌이라고 판단되는 잘못된 규범에 대해서 뿐이다.그러한 그에게 '현행국법질서를 전면 부정하는 자'라는 표현은 너무나 비법률적이기 이전에 모욕적이다. 특히 그것이 그야말로 법적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검사에 의해 표현된 것이어서 슬픔은 커진다.


비법률적이기 이전에 모욕적인

그가 국가권력으로부터 당한 언어적 폭력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3년 서울고등법원은 판결문에서, "그는 재일동포로서 소년시절부터 민족적 차별감정에 의한 반항적 기질을 길러 오다가…"라고 썼다. 이것은 안중근이나 유관순에 대한 일제 판사의 판결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에게는 나를 심판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지난주이란 영화 <체리향기>를 보고 나오면서 얻은 작은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기쁨은 진지한 삶의 문제를 평범한 어휘로 다룬 대사의 아름다움이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그 아름다움이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능력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영화나 소설이니까 가능하지 현실은 어디 그러하냐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착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내 주변의 구체적인 현실은 그따위 훌륭한 한 편의 영화보다 훨씬 아름답다. 감옥의 인권운동가가 어린 두 딸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사랑하는 보슬아, 혜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착해진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은 착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우리는 예뻐진다. 우리의 얼굴에는 우리가 가진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너희들을 생각하고 있을
때 아빠는 스스로 착해지는 것을 느낀다. 자꾸만 스스로 예뻐지고 있다고 느낀다. 아빠는 반드시 나갈 것이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빠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해준 것인데, 검사는 그것을 모르고 나쁜 짓이라 생각해서 아빠를 잡아들였다."

편지 속에도 그의 슬픔이 묻어 있다. 그의 편지는 내가 본 어떤 영화나 내가 읽은 어떤 글보다도 아름다웠음에도 기쁨보다는 슬픔을 먼저 전해주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어떠한 행복도 내포하지 못한 깊고 부드러운, 그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슬픔은 사랑 없이도 가능하지만, 사랑은 슬픔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서준식의 슬픔은 승리할 것이다.

차병직(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