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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1천호 기획-문민5년 인권정책 평가> ① 삶의 질

저수준에 대한 기초공사부터


요란한 착공식

‘삶의 질의 세계화’를 땅땅 두들겨 박은 김영삼 정권의 ‘21세기를 향한 국민복지 구상’의 착공식은 요란했다.

박정희 정권의 ‘조국 근대화’, 전두환 정권의 ‘정의사회 구현, 복지국가 건설’, 노태우 정권의 ‘보통사람들의 시대’를 뒤따른 구호 만들기인 ‘삶의 질의 세계화’는 ‘경제성장에 저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복지정책을 펴겠다’는 다짐의 반복이라는 면에서 이전 정권과 차별성을 보이지 못했다. 오히려 국민을 압도한 것은 ‘국가경쟁력의 강화’와 ‘고통분담’에 대한 동참의 재촉이었다.


예산의 현실화 실패

그 대표적인 증거는 사회복지 학계나 시민·사회단체들이 한결같이 지적하고 요구해온 사회복지 예산의 현실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복지정책이 아무리 훌륭한 생각이라도 예산이 따르지 않으면 실효를 기대할 수 없음이 당연하다.

김영삼 정부가 약속한 바대로 2천년 초까지 세계 15위의 삶의 질의 세계화를 이룰 작정이었다면 향후 2천년까지 매년 40%이상의 복지예산 증액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복지예산 계획은 평균 재정증가율(15%)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증액(20%)에 머물렀을 뿐이다. 이러한 소극적 계획마저도 95년까지 전반적인 복지예산 증가율이 평균적인 재정증가율에도 미치지 못한 결과로 끝났으며, 97년에 와서는 방위비의 12% 증액에 밀려 그나마 잡혀있던 항목마저 대거 삭감되었다.

<표>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나라 복지 예산은 정부 총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6%정도로서 GNP의 1%에도 못미치고 있다. 우리가 가입한 OECD국가들의 경우 현재의 우리와 1인당 GNP 수준이 비슷했던 60-70년대에 평균 7%대의 사회보장비 지출 비율을 보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국민소득 1만 달러시대에 진입한 한국인이 느끼는 복지체감은 병원 갈때 의료보험 카드 챙기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보장 안돼

예산부족 타령이 계속 통할 수 있는 것은 정부가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으로 가득찬 현행 사회복지법의 부실성과 관계가 깊다. 국민이 사회복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근거도 국가의 책임과 의무가 제대로 규정된 법에 의존하기 보다는 언제라도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대통령 공약사항등에 의존하는 경향이 여전하다. 물론 사회복지권을 청구권적 권리로 인정하는 나라는 드물다. 하지만 우리처럼 ‘국가가 ~해야 한다’가 아닌 ‘~할 수 있다’는 식의 ‘임의성’에 좌우되는 현행 복지법에 대수술을 가하지 않는 한 어떤 복지시책이 나오더라도 실효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최저수준을 넘어서

단지 먹고 살기 위한 시대는 지났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최저수준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보장받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답이 머뭇거려진다. 소득, 보건의료, 교육, 주거, 고용, 환경, 복지서비스 등 영역에서 국민생활의 최저수준을 가늠할 합의된 기준선이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가 ‘질’을 얘기하기 원했다면 이러한 최저수준에 대한 기초공사를 해야했다. ‘삶의 질의 세계화’가 외면한 기초공사는 경제만 잘 풀리면 그 혜택이 사회 밑바닥까지 돌아갈 것이라는 안일함을 갈아엎고 모든 국민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책임이자 국민이 누려야 할 당연한 기본권임을 다지는 일이었다. 자유와 평등을 양축으로 한 인권의 종합적인 보장은 수많은 국제인권법에서 공인되고 여러 기구에서 재차 확인돼온 것이다. 소수의견의 보호가 중요하듯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삶의 최저선 확보는 곧 인권보장이며 국가의 배려가 아닌 의무사항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