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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현장을 뛰는 사람들 ⑧ 강인영 (광주 인권지기 사무국장)

이 땅의 햇살한줌으로 살아가는 인권지기

95년 겨울의 고민

‘광주 시민의 의식수준은 매우 높고 운동 역량도 충분하다. 하지만 전문적 운동의 토대가 너무 허약한 것은 아닌가’는 고민 속에 몇몇 젊은이들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인권’이라는 단어에서 광주지역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였고,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80년 5월 광주’ 이름에 걸맞는 적극적인 인권찾기의 꿈을 키우게 된다. 그 고민은 10년 후에는 광주지역에 인권센터를 열겠다는 포부가 되었고, 그 시작은 96년 5월 3일 ‘인권지기’(회장 이동균, 나주금천중앙교회 목사)의 창립이다.


상식을 뒤집는 사건

6·10세대인 강인영(30․사무국장) 씨 도 이때 뜻을 같이한 사람 중 하나다.

87년 전남대 1학년이었던 새내기 시절, 태어나서 목포를 떠나본 적이 없는 그에게 광주는 생경한 도시였다. 입학 후 한 달간은 학교와 자취방만을 오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인문관 앞까지 전경들이 들이닥쳐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는 순리와 상식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에게 전경이 학교 안까지 들어온 것은 상식을 뒤집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부당함에 대항하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하는 친구들의 모습 또한 그에겐 의문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전경들 사이를 뚫고 동아리방으로 갔다. 당시 그는 두개의 동아리에 가입해 있었는데, 그림동아리인 ‘그리세’와 또 하나는 ‘가톨릭연구회’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리세’에 마음이 더 끌리고 있었다. ‘그리세’ 방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캔버스 앞에 앉아 데생을 하고 있었다. ‘선배들이 상황을 모르고 있구나’ 싶어 떨리는 심정으로 위급한 상황을 얘기하자 선배들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에 너무 화가나 동아리방을 박차고 나와 가톨릭연구회를 찾아갔더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싸움을 나가고 없었던 것이다. 그 날부터 그의 생활은 크게 변하였다.

몇달 뒤 87년 6․10항쟁의 물결 속에서 몇 날 며칠 밤을 광주시내에서 선배․동료들과 밤을 지샜다. “내 인생에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커다란 성과를 가져온, 모두가 힘을 합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뜸뿍 안겨준 사건”으로 그는 6·10을 기억한다.


신바람나는 운동

동아리와 ‘광주·전남지역 대학생대표자협의회’(남대협) 활동을 거쳐 9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2년간 사진을 배웠다. 경제적 자립을 통해 중도포기 없이 운동의 길을 계속 걷고 싶었던 그는 ‘자신만의 능력’을 갖추고 싶었던 것이다. 프리랜서로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을 갖춘 뒤 그는 본업을 찾게된다(지금 그에겐 ‘웨딩포토’가 부업이고, 인권지기가 본업이다). 2년간의 사회경험은 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깨닫게 해주었고, 유연성을 가져다 주었다.

“의무나 당위가 아닌 신바람나는 운동은 무엇이며, 내가 잘할 수 있고, 나의 특성에 맞고,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는 고민을 가장 깊이 한 시기였다.

그 고민은 95년 5월, ‘5․18 15주년 행사위원회’의 일과 광주전남연합 인권사업 담당자를 거쳐 인권지기 창립멤버로 결합하기까지 그를 이끌었고, 막연히 생각해온 “사람의 권리를 찾는 운동”에 대한 상을 잡아나가게 해주었다.


늘어나는 인권지기

어느새 인권지기는 한 살을 맞았다. 인권지기는 그간 △양심수 석방운동 및 후원사업 △인권교육사업 △인권침해에 대한 대책마련과 구명활동 △‘햇살한줌’ 발행 △제1회 광주인권사랑한마당 개최 등의 사업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더불어 인권지기들도 꾸준히 늘어왔다. 처음 1백50명으로 출발한 인권지기 회원은 매달 20명씩 불어 4월에는 4백여 명을 넘어섰다. 많은 이들이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밝히는 따스한 “햇살한줌”이 되고자 하는 바람으로 인권지기의 문을 두드려 온 것이다.

올해는 지금까지의 사업을 꾸준히 진행시키는 것 외에도 급박한 인권침해사안에 대해 적극 대처하는 ‘구명센터’로서의 활동을 강화할 계획이다. <햇살한줌>이 전문인권교양지로 발돋음 해야하고, 4백여 회원들의 성장을 위해선 정기산행, 양심수 자매결연, 인권교육, 재판모니터링, 교도소 실태조사모임 등이 숨가쁘게 움직여줘야 한다.

하지만 요즘도 이따금 “재가 저런 일(인권운동 정도를)을 할 얘가 아닌데…”하는 말을 주변에서 듣는다. 인권운동은 민족민주운동과 무관하거나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보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는 것이 인권지기의 생각이다. “인권운동은 현재 민족민주운동의 강화에 기여하고 있으며 또한 민족민주운동 역량의 강화는 인권상황의 개선에 영향을 주고 있다. 시대와 사회가 바뀔 수록 인권의 개념과 주요 인권사안들 역시 바뀌어 갈 것이다. 인간이 존중받는 사회실현과 우리시대 인권의 가장 큰 문제인 통일 문제의 해결은 서로 결합된 사안이다”는 설명이다.


인권센터 창립을 꿈꾸며…

1년을 사무국장으로 살림을 꾸려오면서 그는 전문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이런저런 고민 속에 남들이 ‘노처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분간 결혼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었다.
창립초기, 10년안에 광주에 인권센터를 만들자고 뜻을 모은 젊은이 중 하나인 그는 신바람나는 운동 속에서 그 날을 만들기 위해 오늘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