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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단체탐방 34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쫓아 민주화·인권이 실현을 위해 나선 신부님


우리 할머니들 시절, 가을걷이에 나선 주인은 자신도 넉넉하진 않지만, 먹을 것을 찾아 추수가 끝난 밭을 찾아올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작물을 다 걷지 않고 남겨놓았다고 한다. 뒤이어 찾아온 그들은 그것을 걷어가면서 또 뒤에 찾아올 이들을 생각했고, 그 뒤에 찾아온 사람들은 눈 내린 뒤 먹이를 찾아 마을로 내려올 들짐승의 몫으로 얼마간을 남겨두었다고 한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닌데 참으로 아득하게 들리는 것은 각박한 우리네 삶을 얘기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남을 생각하는 넉넉함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얘기다. 그러나 이 얘기는 결코 지난 얘기만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맑은 물을 솟아내는 옹달샘의 역할을 해온 이들이 있다. 잠시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범을 쫓아 나선 신부님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의 지난 20년의 역사는 한국현대사의 20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현장의 중심에서 때로는 주변 부에서 일관된 목소리를 내온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우리사회는 60, 70년대 경제발전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으나 민중의 삶은 70년 11월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을 하는 사건으로 대변된다. 그리고 또다시 71년 8월 ‘토지불하 가격인하와 세금면제’등을 내건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이 시위는 3만여 주민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이 두 사건은 벼랑 끝에 몰린 민중 삶과 민중의 생존권 요구를 절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사제들은 침묵으로 일관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결성을 예비한 이로 대표되는 인물은 지학순 주교이다. 원주교구장이었던 그는 유신시대의 폭정 속에서 71년 10월 5일 사흘간 원주 문화방송국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운동을 일으킨다. 지주교가 앞장서 시위와 농성을 벌인 이 사건을 정의평화운동의 중심으로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그리고 농성 끝에 원주교구는 상설기구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지주교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반 유신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마도 여기서 그쳤다면 정의구현사제단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긴급조치 시대가 이어지는 속에 박정권은 74년 7월6일 해외에서 돌아오던 지주교를 ‘민청학련에 대한 자금 제공과 내란 선동, 정부 전복’ 등의 혐의로 공항에서 연행한다. 이 사건은 교회안팎으로 커다란 충격을 던져주었고 전국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에 의해 정의 평화를 위한 철야기도회가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6일 “조국을 위하여, 정의와 민주회복을 위하여 옥중에 계신 지주교님과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이 기도회를 바칩니다.”는 성명서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그 뒤 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운동, 75년 서울대생 김상진군 자결사건, 76년 김지하 구명운동, 3․1절 명동성당 기도회 사건, 77년 김병상 신부 구속사건, 78년 동일방직노조탄압 사건, 79년 오원춘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정의구현사제단은 함께 한다. 10․26사태 후에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구명운동을, 광주민중항쟁에 대해서는 진상조사와 규명을, 부산 미문화원방화사건, 부천 성 고문 사건 후에는 고난받는 이들과 고통을 나누는 신부들이 있었다. 박종철 군 고문살인 사건 때, 고문사실을 사회에 알려낸 김승훈 신부의 목소리는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통일의 꽃 임수경양의 방북사건, 그리고 그 사건에는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건은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가 나란히 손을 잡고 휴전선을 넘어서던 모습이다. 87년 6월항쟁 시청광장 앞 시위를 마치고 고단한 몸을 누이던 명동성당은 전교조 선생님들의 단식농성 장이 되는 등 정의와 양심의 횃불이 밝혀지는 성소로 국민들에게 알려져 나갔다. 이렇듯 정의구현사제단은 이 땅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냈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가 4:18-19)

사제단의 결합은 교회 내적으로도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교구를 뛰어넘는 사제의 서로의 연대와 협력을 가져왔다. 피정과 세미나를 겸한 정례 사제단회의는 사제 서로간의 친목과 연대, 협력을 강화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시대의 요청에 용기로써 대처해왔던 정의구현사제단이었기에 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정의구현사제단에게 돌려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사람들 사이에선 ‘정의구현사제단이 너무 잠잠한 것을 아니냐’는 얘기를 종종 듣고 있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 내부에서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꾸준히 움직이고 있다. 조용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사회 속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역시 그 중의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현장을 숨가쁘게 달려온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렇다할 조직들도 규정도 없다. 공동대표로 김승훈․김병상․함세웅 신부가 있고, 전국의 2천여 명의 사제들이 함께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주요사안에 접할 때마다 필요성에 의해 서로들 모이고 힘을 합쳐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학로 혜화동의 뒤편으로 위치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이와 같은 일을 진행시켜온 사무국이 자리잡고 있다. 사무국장 최경욱 씨를 비롯해 상근자 5명. 역할 분담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사안에 따라 일이 맡겨진다. 별달리 움직임이 없어 보이지만 큰 강을 향해 흐르는 샛강처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숨은 움직임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주간소식지 <빛두레>를 발행하는 일과 도서출판 「빛두레」를 운영하고 있다.

93년 8월에 만들어진 출판사를 통해 『한국천주교회사』『멍에와 십자가』『삶의 끝에 서서』『칼을 주러 오신 예수』등 많은 책들이 선보였다. 또한 내년 봄에는 연구소가 문을 열 준비중이다. 자료실이 될지 연구실이 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하지만 지금은 사무실 한 칸을 차지하고 빽빽이 쌓인 책들을 정리해 가고 있다.

일상업무 외에도 중요한 일은 교회 내에서의 일이다. 정의구현사제단이 이제까지 교회 밖의 역할에 힘을 써왔다면 이제는 교회 안에서의 역할에 보다 많은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안팎의 제한과 탄압 속에서 사제의 양심에 입각해 교회 내에서는 복음 화 운동을, 이사회에서는 민주화와 인간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역할인 것이다.

시대의 양심으로 찬사를 받아왔으나 정의구현사제단의 행동에는 반성도 따른다. 우선 현실을 개선해 나가는 적극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기보다는 사태발생에 뒤좇아가는 것이었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다. 물론 70년대이래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던 교회의 모습을 진취적, 민족적 이미지로 부각시켜 일반인들에게 신뢰감과 친숙감을 준 것은 사실이나 내부적으로 얼마만한 변화가 있었는가 하는 반성이 따르고 있다. 또한 역사적 현실적인 측면을 포괄하는 신학적 논의와 이를 위한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반성이다. 교회 안에서의 요구를 받아들이자는 반성에는 이상의 숙제들이 해결과제로 나서고 있다. 거리로 나섰던 신부님들이 각 지역성당에서 뿌리를 내리고 교회의 제도적, 의식적 개혁의 사명을 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밀알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의 말은 지금껏 거쳐온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길과 앞으로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사제단의 신앙이 ‘현실 속에서의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를 향한 발언을 넘어서 사제단 스스로가 ‘현실의 한 주체’가 되었기에 가능했다”(『멍에와 십자가』93. 10.).

<인권운동사랑방 김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