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쉬엄쉬엄 달리겠습니다

오랜만에 ‘활동가의 편지’를 쓰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딱 1년 전이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늦여름, 재택근무를 하며 동네 산책에 재미 붙인 이야기였다. 불과 1년 전인데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요 산책코스였던 노들섬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대통령이 참석하는 ‘탄소중립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고, 우리는 그곳에서 ‘투쟁’을 했다. 너른 공터였던 노들섬 헬기 착륙장에 실제로 헬기가 내리고, 지붕 위에는 대통령 경호팀이 도열했다. 짧지만 강렬했던 ‘탄중위 해체 공대위’ 활동을 11월에 마무리하고, 늦가을 다시 찾은 노들섬은 너무 시원하고 상쾌했다. 한달 전의 ‘노들섬 투쟁’은 아련했고, 갑자기 달리기가 하고 싶어졌다. 운동화와 조깅복, 스마트밴드까지 충동구매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졌다.

올해 봄은 대가뭄이라고 했다. 서울에 있으니 잘 몰랐다. 분명 한강 수위가 꽤 줄었을텐데도 말이다. 우연히 지나간 소양강 바닥이 훤히 보이는 걸 보고 실감했다. 노들섬과 함께 전망맛집 산책코스였던 동네 공원은 전망까페를 하나 더 만든다고 경사지를 깎고 건물을 올리고 있었다. 대통령이 바뀌었고, ’에너지 시장화/민영화’와 ‘원전 대폭 확대’를 기후위기 대응책으로 내놨다. 그래도 ‘기후정의동맹’이 꾸려져서 답답하지만은 않았다. 공공/민주/생태적인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을 이야기하며, 지역과 노동자들을 만났다. 답답한 정부 비판을 넘어, 투쟁하고 대안을 만들어갈 ‘관계’가 생겼다. 일도 많아졌고, 개인적으론 부담도 커졌다. 그래서 8월 첫 주 매일 노들섬을 달렸다. 웬걸, 그 다음주에 폭우가 쏟아졌다. 강남에선 외제차가 침수되었고, 신림동 반지하 가족은 목숨을 잃었다. 노들섬은 완전히 잠겼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역대 가장 강력한 수퍼 태풍이라는 ‘힌남노’ 예보가 일주일동안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여전하고, 사랑방 활동가들도 줄줄이 확진되고 있다. 유럽과 중국, 파키스탄의 기후재난 소식과 우크라이나 전쟁 소식까지 듣고 있자면 답답함과 체념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기후재난, 이대로 살 수 없다’ 9.24 기후정의행진을 준비 중이다.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외쳤던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이들의 선언은 나에겐 제안이었다. 사회의 변화보다 세계의 붕괴를 받아들이는 체념과 헤어지자는.

분명 앞으로 살아가게 될 세계는 여러모로 다를 것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10월이 되면 작년처럼 다시 노들섬을 달리고 싶어지는 날씨가 돌아올 것이다. 그런데 내년에도 그럴 수 있을까? 그 다음해에도? 쉽지 않을 테다. 우리의 일상은 분명 달라질 테고, 새로운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녹록치 않은 일상이겠지만, 모두가 함께 평등하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태풍과 폭우에 섬이 잠길 땐 잠시 쉬더라도 계속 달려야 한다. 인생이 오래달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