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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기묘한 4월을 보내며

4월이 시작되던 주말, 겨울옷과 침구를 정리했습니다. 따뜻하고 햇살 좋은 날이 며칠째 이어지던 중이었어요. 온 집안의 창문을 활짝 열어 겨우내 묵은 공기와 먼지를 빼내고, 두꺼운 겨울 이불을 세탁기에 돌리며, 미리 세탁해 둔 간절기용 차렵이불을 펼쳤습니다. 침대에 깔려있던 온수매트의 물을 빼내고 차곡차곡 접어 옷장 위에 올려둔 뒤에는, 매트리스를 들어내 수납 기능이 있는 침대 프레임 속에 겨울 외투와 니트를 집어넣고 대신 얇은 옷들을 빼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옷을 세탁한 뒤 옷장을 정리하며, 드디어 길고 긴 겨울이 지나갔음을 기뻐했습니다.

며칠 뒤, 내가 너무 성급했다는 후회와 함께 매트리스를 다시 들어내 겨울 외투를 꺼냈습니다. 온수매트를 다시 설치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도무지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고, 대신 이전에 수납해둔 두꺼운 겨울 이불을 다시 꺼내 덮었습니다. 기껏 세탁해서 뽀송뽀송하게 말렸던 이불을 며칠 만에 다시 쓰기는 조금 아까웠지만, 설령 이불 세탁을 한 번 더 하더라도 밤새 덜덜 떨며 잠자리에 누워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갔다고 기뻐했던 게 고작 며칠 전인데 다시 겨울이 찾아온 것 같다는 우울함을 느끼면서요.

4월 11일 월요일,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앞 농성을 시작하는 날이었습니다. 사랑방의 동료 활동가인 미류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이종걸 활동가가 단식을 시작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농성장을 차리는 데 힘을 보태고자 사랑방 활동가들도 아침 일찍부터 국회 앞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몸싸움이 있을까 싶어 조금 두꺼운 긴팔 옷을 입고, 밤까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 외투도 챙겼습니다. 그날은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주 맑은 날이었어요. 농성을 위한 텐트가 들어올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국회 담장 앞 보도블럭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오전 동안, 온몸이 익어가는 걸 느끼며 앞으로 이 자리에서 단식과 농성을 이어나갈 활동가들을 걱정했습니다.

그리고 4월 말의 어느 날 밤, 잠을 자다가 추위 때문에 깨어났습니다. 약한 감기 기운을 느끼던 중이기는 했지만, 새벽에 덜덜 떨며 깨어나 본 일은 처음이라 추위보다도 당황스러움과 어이없음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심지어 한겨울도 아니고, 4월도 다 지나가 5월을 바라보던 시점이라니요. 급하게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옷장을 뒤져 내복과 자켓을 꺼내 입은 뒤에 다시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날씨에 ‘이런 게 기후위기인가’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던 것 같아요. 이후 며칠 동안은 감기가 심해져 꽤나 고생을 했습니다.

한 달 동안 사계절을 번갈아가면서 겪고 나니 진이 다 빠진 느낌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날씨와 기온을 확인하며 옷차림을 고민했고, 큰 일교차 때문에 꼭 겉옷을 가방 안에 넣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해치웠나?”라는 대사만 나오면 꼭 다시 부활해 나타나는 애니메이션 속 악당처럼, 이제는 정말 지나갔나 싶을 때 다시 찾아오는 추위 때문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린 듯합니다. “이번 여름은 정말 덥다”는 말과 “이번 겨울은 정말 춥다”는 말을 매년 되뇌곤 하지만, 정말이지 이번 겨울은 유독 길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아있어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그래서 더욱 길게 느껴지는 겨울이었습니다.

이렇듯 기묘한 4월을 보내며, 봄이란 그저 겨울이 가면 자연스레 오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년 말 국회 앞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농성장을 차리던 날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습니다. 그때는 천막 반입조차 가로막혀서, 파라솔 위에 얹은 커다란 비닐을 활동가들이 직접 손으로 받쳐가며 농성을 시작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비와 함께 농성을 시작한 셈입니다. 그리고 올해 4월, 겨울의 끝을 알리는 뜨거운 햇빛과 함께 다시 한 번 농성장을 차렸습니다. 일교차가 큰 날들이 이어져 낮에는 더위에, 밤에는 추위에 고생하는 나날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보태주는 힘으로 농성장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겨울을 몸소 밀어내며, 직접 ‘차별금지법 있는 봄’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분명 고되지만, 그만큼 즐겁고 또 뭉클한 시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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