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 이야기

차별잇수다, 변화로 이어지는 말하기와 듣기

‘서로를 공감하는 눈빛, 말할 준비를 기다려주는 느린 시간, 손을 꼭 잡고 지지해주는 마음, 연대하는 분노, 토론 과정 속의 긴장감, 혐오와 차별에 대항하는 용기.’

자신의 차별 경험을 말하면서 누군가의 차별 경험을 듣는 자리이자, 동시에 모두가 함께 대항적 말하기와 대안적 서사의 가능성을 짚어보기도 했던 차별잇수다. 2019년에만 40여 회가 열릴 정도로 풍성했던 차별잇수다의 한 해 활동을 돌아보는 자리가 <말하는 우리, 커지는 용기>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인권운동의 방식으로써 말하기의 역사, 차별 경험을 이야기할 안전한 공간에 대한 필요성, 듣는 사람만이 아닌 동료시민으로서의 역할, 평등에 대한 대안 서사의 힘 등 다양한 의미가 다루어졌지만, 차별잇수다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정서적 역동 속에서도 눈에 들어온 건 ‘토론 과정 속의 긴장감’이었다. 내가 느낀 긴장을 되짚어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느꼈을 긴장은 무엇이었을지를 떠올려본다.

 

‘토론 과정 속의 긴장감’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차별잇수다 뿐만 아니라 어느 자리, 어느 관계에서건 차별 경험을 꺼내놓는 개인적인 방법을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 하다. 여러 대화의 순간을 지나면서 어떤 순간에 다수의 의견을 내세워서 내 경험을 정당화해야 할지 혹은 어떤 순간에 정색해야 하는지 나름의 기준을 갖게 되기도 한다. 시사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내 경험을 고발해야 할 때와 마치 제3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전달해야 할 때, ‘분위기 파악’을 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또 사건이나 사실이 아니라 오롯이 들여다본 내 감정을 섬세하게 전하고 싶은 대화 상대와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삶의 전략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하지만, 어떤 시간을 지나다보면서 자연스럽게 익은 몸의 반응이랄까.

그런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자리가 바뀌는 순간,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경험을 어떤 문제로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는 기존의 경험치로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능했지만, 나는 어떻게 듣는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상대적으로 빈곤하다. 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이야기들에는 공감할 수 있는 경험들이 녹아있었지만 그 공감의 표현이 눈빛으로 충분할지,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이 필요한지 아니면 내 이야기로 상대의 이야기를 받아주는 것이 필요한지, 내 분노가 말하는 사람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은 아닌지, 연대와 지지의 마음은 어떻게 가벼운 제3자의 응원이 아닐 수 있는지….

나를 비롯해서 차별잇수다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바랐던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은 그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관계를 전제한 것은 아니었을 테다. 그런 공간은 말하기 위해서 어떤 순간 발휘해야 하는 각자의 용기와 더불어 서로의 경험을 타자화하지 않고 들어줄 수 있는 상대 모두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왜 저 순간에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의구심이 들었을 때 잘 모르는 상황이나 왜 말하는 사람이 차별이라고 느꼈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일, 공감을 표현하고 지지하고 싶은 순간에 ‘잘’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이 쉽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듣는 행위가 곧장 말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와 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대화의 출발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을 사실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차별잇수다에서 나의 어색함은 여전히 말하는 자리에서는 ‘내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으로, 듣는 자리에서는 ‘내 관점으로’ 듣는 사람으로 있는 것에 익숙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차별잇수다에서 우리가 서로 그 긴장까지 잘 다룰 수 있다면, ‘동료시민으로서 관계 맺기’의 구체적인 역할들도 더 선명해질 수 있지 않을까? 2020년에도 이어질 차별잇수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은 역할이기도 하다.

 

‘사이다 썰’에 대한 욕망

한편으로 차별잇수다에 참여하면서 ‘만약 그 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하겠어!’를 스스로 적어보고 서로의 경험에 대해 ‘지지, 응원, 위로, 연대, 꿀팁’을 나누는 것은 가장 활기차고 재밌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뭐라고 쓰지?’ 혼자만의 고민에 빠진 시간이기도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나는 그다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데,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전혀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해보면 어때요?’ 꿀팁을 전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닌가?

나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이다’ 꿀팁을 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은 또 다른 긴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즈음 ‘레전드 사이다 썰’이 그렇게 유행인걸까 싶기도 하다. 사이다 썰에서 차별적 상황이나 복잡한 논쟁을 단번에 말끔하게 정리해버리는 건 상대의 논리를 갈갈이 찢어놓거나 찍소리도 못하게 누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니까. 대체로 그 방식이 가능한 건 대체로 돈과 지위, 성별을 비롯한 권력관계에서의 우위를 이용하니까. 나조차도 어느 순간에는 그런 ‘한 방’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이다 썰이 ‘썰’인 이유는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차별적 상황을 벗어날 수 없고, 개인의 자원과 힘으로만 차별이 해소될 리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종류의 억울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사이다 썰에 열광하는 사회에서, 차별잇수다처럼 ‘대항적 말하기’와 ‘대안 서사’를 함께 만들어가는 집단 경험/네트워크를 고민한다는 건 그래서 언제나 늘 새로우면서도 긴장되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개개인들이 차별적인 상황을 스스로 잘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높아지는 과정은 필수적이지만, 그런 책임을 개개인들이 스스로 떠맡도록 전가하는 사회는 곧 차별에 대한 대항 실천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이기도 하다. 개인의 차별 경험을 분절적으로 남겨두지 않고 대안적인 서사로 만들어가겠다는 차별잇수다에서의 다짐은 결국 나 혼자서는 당도할 수 없는 ‘평등’의 말하기를 통해 변화의 힘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더 많은 동료들을 만들 때 실현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라 혹은 지지만이 아니라, 같이 고민과 긴장을 나누는 과정 역시 더 많아지는 과정 속에서 말이다.

 

평등으로 밀어붙이는 힘

많은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차별잇수다에 참여하면서 여성운동의 말하기(speakout) 운동의 역사를 많이 생각했는데, 여성들이 경험한 일상에서의 성폭력 경험들이 봇물처럼 막 터져 나오던 시기, 미투(#MeToo) 운동을 다루는 기사를 볼 때마다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말한다’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나도 당했다’는 의미로만 번역되고 전달되기 십상이었다. 피해자로만 남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다짐과 비슷한 경험을 용기 있게 먼저 꺼내준 여성들에 대한 연대의 의미는 좀처럼 부각되기 어렵기도 했다. 끊임없는 여성들의 말하기가 선택적 해석과 규정의 힘을 돌파해버린 지금, 사회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도록 밀어붙인 말하기와 연대의 힘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스스로의 말하기로, 집단적인 말하기로, 내부와 외부를 넘나드는 연결된 이어말하기로 만들어온 반차별 운동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평등한 사회를 향하는 말하기와 연대의 힘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지 계속 밀어붙이는 수밖에. 그 과정에서 서로의 동료가 되어줄 구체적인 장이자 실천으로서 차별잇수다가 말 그대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