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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읽는 세상

‘공정한 입시’는 모두의 문제일까

공정한 입시가 공정한 사회를 만들 거라는 환상

조국 사태에서 불거진 자녀 입시 특혜 논란으로 ‘공정한 입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입시 비리 의혹이 꼬리를 물면서 국회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경쟁적으로 국회의원과 고위공직자 자녀의 대학입시 전수조사 법안을 만들겠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교육에서의 불공정’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정시 확대를 주요방향으로 한 대입제도 개편을 제시했다.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내놓은 2022년 대입개편안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수시와 정시의 ‘황금비율’을 찾는 것이 입시에서의 공정성을 좌우할 과제처럼 이야기된다. 교육제도가 곧 입시제도로 등치되는 한국사회에서 입시 문제는 모두의 문제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공정한 입시가 정말 모두의 문제일까.

공정한 입시, 그들만의 리그

입시 특혜 논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는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해석되었다. 하지만 이는 소위 상위권 대학 학생들의 분노였다. 이들에게 입시 특혜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경쟁에서 승리해 정당하게 획득한 성취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분노를 드러내는 자리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해당 학교 출신만 허용됐다.

상위권 대학에서 부모가 고소득층인 학생 비율은 더 높아졌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더는 작동하지 않고, 사회경제적 지위에 비례해 울타리의 경계는 더 공고해졌다. 바로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청년들의 분노가 한국 사회 청년들을 대표했고, 울타리 밖 청년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입시 특혜 논란이 일으킨 분노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고졸자로, 지방대생으로, 내세울 학벌도 연줄도 없는 이들이 살아가며 겪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고발은 주목받지 못했다.

정부는 ‘공정한’ 입시제도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공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지 여부가 공정한 입시에 달린 것처럼 이야기된다. 논란이 된 정시 확대 방침은 서울 상위권 대학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명문대’를 목표로 하는 입시경쟁이라는 트랙에서의 경기규칙에 관한 것이다. 그 트랙에 오르지 못한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대학진학이 당연한 사회에서 다르게 산다는 것

한국사회에서 초중고 12년의 교육과정은 대학진학이라는 입시경쟁에서 살아남고 더 높은 등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력을 높이는 시간으로 여겨진다. 1990년에 30%대였던 대학진학률은 2000년대 중반에 80%까지 치솟아 정점을 찍고 현재는 70%를 전후한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10년째 OECD 국가 중 1위다. 대학진학 자체가 계층상승의 통로가 되는 소수의 특권이었던 과거와 현재는 다르다. 대학이 아니라 어느 대학 무슨 과인지가 중요하다.

그러니 대학진학을 위해 써야 하는 비용과 시간을 따졌을 때 이전보다 ‘가성비’가 떨어진다. 한 학기 등록금 평균 670만원. 학자금 대출이라는 ‘빚’을 안고 졸업하지만 졸업 후 취업이 불투명해진 상황은 대학 진학의 필요성을 낮춘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학을 당연한 수순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각오’를 필요로 한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을 때 삶에서 누릴 수 있는 기회와 선택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입시학원 커뮤니티에 올라온 “고졸이 할 수 있는 일이 비슷비슷한 20가지라면, 대졸이 할 수 있는 일은 100가지가 넘는다”는 말은 대학진학률이 여전히 높게 유지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이들에게 허락되는 일의 세계는 어떤가. “취업을 나가면 너는 바로 을이 된다. 을 중에서도 절대 을이다. 수많은 나사가 돌아가는데 꼭 필요한 나사와 언제든지 갈아 끼울 수 있는 나사가 있다. 너는 후자다.” 특성화고 노동경험에 대한 조사에서 취업담당 교사가 강조하는 인성교육의 내용이다. 고졸자가 겪는 불평등과 차별은 당연하며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취업과 연계된 특성화고 교육과정에서는 취업률 수치만 중요할 뿐 노동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불평등과 차별에 어떻게 맞서고 대응해야 할지는 고려사항이 아니다.

이제는 학력과 학벌보다 각자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다양성이 중요한 시대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대학 나와야 그나마 사람대접 받을 수 있는 현실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겪는 무시와 차별은 학력과 학벌에 따라 삶의 기회와 선택지가 달라지는 구조적 차별과 맞물려 있다. 출신학교가 그 사람의 과거를 평가하고 현재를 결정하며 미래를 예상하는 잣대가 된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 이유를 해명해야 할 것 같은 꼬리표가 달라붙는다.

특권과 반칙만 없애면 될까

특권과 반칙을 없애고 입시의 공정성을 세우겠다고 하지만, 누구를 위한 공정일까. 명문대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일 수 있는 조건에서 빗겨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무관한 일이다. 공정한 경쟁 자체를 할 수 없는 울타리 밖 사람들에게 공정한 입시는 어떤 의미가 있나. 울타리 안팎을 나누는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더 뒷받침하는 게 공정한 입시라는 환상이다.

똑같은 시험을 보고 점수에 따라 등수를 매겨 다른 대우를 한다는 것, 공정 경쟁이 모두를 위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 경쟁에 뛰어드는 게 가능하기까지 필요한 자원부터 다르다. 공정한 입시가 공정한 사회를 위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대학을 선택지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배제되어 있다. 공정한 입시라는 환상은 출발점이 전혀 달라 경쟁을 할 수 없거나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의 구조를 더 공고히 한다. 누구에게나 동일한 경기규칙이 적용됐으니 공정한 경쟁이고 그에 따른 결과는 정당하다며 이를 감춘다.

특권과 반칙만 없으면 공정 경쟁을 할 수 있다는 환상 속에서 정부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공정한 규칙을 만들고 이것이 지켜지도록 심판자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주어지는 차등적인 대우는 개인의 능력과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로 승복해야 할 것이 된다. 공정 경쟁이라는 환상은 구조의 문제를 능력 없고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문제로 뒤바꾼다.

줄 ‘잘’ 세우라? 줄 세우지 말라!

무엇을 배우고 가르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로 뒤바뀐 교육, 공정한 입시 논의에서 교육은 수단으로만 여겨질 뿐이다. 대학을 가기 위해 초중고 12년을 어떻게 보낼지가 정해지고, 어떤 대학을 갔느냐에 따라 이후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은 이들의 목소리는 작지만 언제나 있어왔다. 어째서 원하는 배움이 아니라 시험을 위한 공부만 해야 하는지, 서로가 돕고 함께 성장하는 게 아니라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지는 경쟁을 해야 하는지, 미래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불행을 견뎌야만 하는지 말이다. 대학은 유일한 선택지가 아닌 여러 선택지 중에 하나여야 한다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매년 수능 날 이어지고 있다.

불안과 두려움을 학습시키며 다른 선택지에 대한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학교와 사회를 그대로 둔 채 공정한 입시가 대안이 될 수 없다. 대학에 안가도 잘 살 수 있고, 일하면서 학벌 때문에 억울하지 않고, 공부하면서 불안하지 않다면, 공정한 입시라는 환상이 필요 없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건 줄을 ‘잘’ 세울 방안이 아니라 줄 세우지 않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요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