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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전쟁터 같은 만리포에서 반나절

# 똑딱선은 어디가고
만리포에 도착하니 8시 정도. 낮게 안개가 드리운 해변은 철조망에 갇혀 있다. 지난 여름 대추리에서 ‘여름나기’를 준비하다 박진과 땅콩(진이 딸) 그리고 여진과 함께 탈출하듯 하루 휴가를 보냈던 곳이었는데, 땅콩의 깔깔대던 웃음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무색하리만큼 주위는 긴장이 돈다. 해안선은 적군으로 위장한 한국군 참호 뒤로 철조망이 쳐있고 그 뒤로 전투경찰이 길게 늘어서 있는 희한한 풍경.
백여 명 쯤 모인 거 같다. 평통사, 통일연대, 범민련, 충남 민노당 등등. 인권단체 반전평화팀에서는 모두 6명. 9시부터 본격적으로 집회가 시작되었고 십여분이 지나자 수평선 위로 거대한 군함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7척 정도. 똑딱선은커녕 부표하나 없이 바다는 전쟁연습을 위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저렇게 깨끗이 비워두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민관협조’를 했을지 모를 일. 상륙함이 서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집회 참가자들은 바다를 향해 악을 쓰듯이 구호를 외친다.(OUT NOW US MARINE / NO WAR YES PEACE / SIGN NOW PEACE TREATY, WE DON'T NEED US MARINE 등) 7척의 군함이 뱃머리를 뒤로 돌리더니 수륙양용 장갑차 수십 척을 바다 위에 토해낸다. 미군 상륙정 LCAC(Landing Craft Air Cushion, 공기부양상륙정)도 함께 거대한 굉음을 내며 해안선을 향해 다가온다.

# 작전 개시
3월 25일부터 시작된 RSOI(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의 상징적 연습이라는 상륙작전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리포로 들어왔다. 만리포가 북한의 남포와 유사한 지형이라서 그렇단다.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 상륙작전이 시작됐다. 예정보다 1시간 반가량 늦어졌다고. 우리 때문일까?(흐흐 그랬으면...) 한국군 해병대의 장갑차부터 상륙한다. 12대가2007년 3월 29일 만리포 해수욕장에서 진행된 한미연합전시증원연습 [출처] 통일뉴스 1조를 이루었고 해안선 가까이 도착해 폭탄을 한번 씩 요란하게 터뜨리며 들어온다. 동시에 하늘에서는 전투기와 헬기가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육지를 따라 비행한다. 나를 포함해 일부 참가자들은 비명을 질렀다. 순간적인 공포가 엄습한 듯. 이렇게 4차례를 한 거 같다. 한국군 장갑차와 제트기(한국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가 먼저 엄호한 뒤 미군의 장갑차와 군인들을 실은 수송선이 해안으로 들어온다. 장갑차는 상륙하자마자 32번 국도로 빠져나갔다. 집회참가자들은 준비한 종이비행기도 날리고 목이 터져라 구호도 외치고 야유와 고참소리로 반격했다. 반전평화팀은 같은 장소에서 계속 항의집회를 했지만 한국교회인권협의회 소속 목사 10명과 학생들은 상륙한 장갑차를 따라 다니며 항의기도회 등 항의행동을 한 모양이다. 훈련 중인 군인들이 꽤 당황했다는 보도. 검은 천으로 둘려 싼 십자가를 들고 장갑차를 따라다니며 기도회를 했다니 좀 기괴하지만 나름 신선하기도 하다.



# 쌤통
상륙한 미군 장갑차 몇 대가 국도로 빠져 나가지 않고 해안선에 주저앉았고 미군 수송선도 해안선으로 들어왔다 빠졌다를 반복한다. 상륙한 미군 장갑차 2대가 고장 나서 다른 장갑차로 견인한다. 집회참가자들이 “견인훈련이냐” 야유한다. 완전히 스타일 구겼다.
집회도 꽤 길어졌기 때문에 잠시 휴식. 집회장 근처가 차벽에 둘러싸였기 때문에 다른 곳 분위기도 살필 겸 32번 국도 쪽으로 나왔다.
천주교인권위 변연식 위원장과 몇 명의 사람들이 'PEACE'라는 현수막을 들고 해안선 철조망 쪽으로 다가가고 있고 경찰이 막아선다. 철조망에 현수막을 걸어보려고 작정한 모양. 개량한복을 차려입고 머리에 스카프 길게 드리운 변 위원장이 노란 현수막을 들고 모래사장 위를 걷는 모습은 경찰이 막지만 않았다면 퍼포먼스 같았을 듯.

# “군대물을 빼자”?
어느 소설에서 대학 내 기독교 동아리의 전체주의적 문화를 비판한 대목이 생각난다. 군대 갔다온 예비역들에게 군대 문화를 일소시키기 위해 물구나무 서서 “군대물을 빼자”라는 구호를 수차례 강요했다는 것인데, 집회 내내 발언자들은 ‘미 제국주의의 더러운 군홧발에 한반도를 유린당하지 않도록...’ ‘우리 수영선수들이 선전했던 것처럼 끝까지 적들과 싸워...’ 등등으로 독려하면서 집회참가자들을 ‘미제와 싸우는 신성한 군대’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주최 측에서 준비한 ‘반미투쟁가’와 ‘민중의노래’(개인적으로 좋아한다)가 너무 군가와 흡사해서 노래를 부르며 깃발을 흔들고 있으니, 아뿔싸! 환영 나온 인파 같기도 했다.

# 우덜은 괜찮아
점심 식사를 하면서 식당 주인에게 은근히 물었다.
“훈련 때문에 피해는 없으세요?”
“반대하러 오신 분들인가 보네... 여기서 안하면 어차피 또 다른 데로 가야 하니까... 피해는 잘 모르겠는데... 우덜보다 농가에 피해가 있을 거예요. 시끄러우니까. 근데 이 훈련 안 해도 되는 건가?”
국가가 하는 일에 당연히 협조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선량한 식당주인은 지역 주민의 의사도 묻지 않고 2년씩이나 계속된 군사훈련에 대해 별 반감이 없다. “전쟁훈련이고 핵무기까지 동원된다. 북과 미국이 사이가 좋아지고 있는데 왜 북을 겨냥한 군사훈련이 필요하냐”라고 짤막하게 설명해 드렸다. 반전평화팀에서는 주민들 의견조사를 하면 좋겠다고... 할 일은 쌓여 가고.

# 해병대 전우회
만리포에서 도착해 바로 아침밥을 먹는데 해병대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우르르 들어온다. 식당 주인과 인사를 하면서 “우리 후배들이 들어온다는데 나와 봐야지”한다. 해병대 전우회 충남지회는 이미 만리포에 “합법적 군사훈련 보장하라”는 현수막을 걸었다. (근데 이게 무슨 말이지?) 암튼 이날 만리포 곳곳엔 해병대 전우회가 진을 치고 있었다. 길을 걷다 무심코 한 명과 눈이 딱 마주쳤다. “여기서 지면 안돼!” 속으로 외치며 눈싸움을 한바탕 벌였는데 어찌나 등에서 땀이 나던지.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