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활동가의 편지

다름을 포용하려는 양심의 목소리로

2011년 1월4일, 21살이 됨과 동시에 인권운동사랑방에 처음 발을 딛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들어와서 집 같은 회사에 한번 놀라고, 가족 같은 분위기에 또 한번 놀란 것이 기억납니다. 벌써 사랑방에 매일 같이 나와 함께 활동하고 밥 먹은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네요.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맡은 일은 강제철거 감시단 활동이었습니다. 처음해보는 인터뷰, 처음해보는 보고서 쓰기는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내가 이렇게 영향력 있는 일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내심 뿌듯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듣고 보고 참여해야 하는 이런 일들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기회가 되는 모든 일을 함께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활동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차별금지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차별금지법’이라는 이름만 보고 막연하게, 아, 만들어지면 좋은 법이겠구나 생각하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을 가서 차별금지법이 어떤 법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아직 차별금지법에 대한 저의 의견은 확실히 자리잡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 주 일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목사님께서는 설교의 절반을 성도들에게 차별금지법을 반대해야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투자하였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의 그러한 외침에 ‘아멘’으로 대답했고,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어느 정도 배우고 온 저조차도 목사님의 논리에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은 문 앞에 서서 성도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그 날은 다른 순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회를 나가는 성도 한 명 한 명에게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사만 하고 급하게 나오던 저를 붙잡으며 목사님께서 서명 꼭 하고 가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황했으나 제 논리에 자신이 없던 이유에서였는지, 목사님의 설교에 설득된 것인지, 거기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 의견에 설 자신이 없어서였는지 결국 서명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며 곧 후회했습니다. 내 의견 하나 분명히 표현하지 못한 것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더 많은 사람 앞에서도 정의를 위해 혼자 ‘아니오’를 외치고 부당함과 싸우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웠습니다. 

제 역할은 차별금지법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면서도 제가 차별금지법에 확신을 갖지 못하게 했던 몇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특히 동성애가 에이즈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동성애는 치료해야 할 대상이라는 목사님의 주장은 꽤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어쩌면 동성애자라는 단어 자체에 부정적인 사회통념에 제가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사랑방 가족들과의 식사를 하던 중, 차별금지법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동성애가 정말 에이즈 확산에 영향을 끼치는가? 그렇다면 동성애는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라는 목사님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것은 제가 아는 부분이 극히 일부분이었기에 생긴 오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동성애 자체는 에이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이런 내용을 왜 들리는 그대로 믿어버렸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에이즈 환자를 기피하고, 이 때문에 에이즈환자들은 자신이 에이즈환자임을 드러낼 수 없습니다. 이는 오히려 수혈을 통한 에이즈 감염의 위험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전국민 앞에 공개되는 신문에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된 내 아들, 에이즈로 죽으면 SBS책임져라’, ‘며느리가 남자라니 웬 말인가’ 라는 제목을 실은 기사를 내보낸 다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료를 수집하던 중 동성애자 차별에 대한 금지를 반대하는 주장이 차별금지법 전체를 반대하기 위해서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교회의 목사님들이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또는, 교회의 위치는 생각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고 차별금지법 반대 서명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그들은, 예전의 저처럼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기에 실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차별금지법 반대의 표면적인 이유만 본다면, 특히 목사님이라는 신분에서 성경책이라는 절대적인 것에서 ‘반대한다고 하는’ 그런 개념을 다루게 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알아야 합니다. 더 자세한 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저를 괴롭히던, 성경말씀을 거스르는 일에 내가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은 저의 ‘기독교적 양심’을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식사시간은 저의 이런 걱정까지 해결해주었습니다. 성경책에서는 돼지고기도 먹지 말아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금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 일부에서는 필요한 부분만 과장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는 모두에 대한 사랑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은 것,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문득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 법이 그대로 무너지는 것을 방관한다면 저의 ‘기독교적 양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