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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어제보다 오늘의 내가 조금씩 나아지길 바랄뿐…

지난해 자원활동을 시작하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것이 있었다. 오버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뒷감당 생각 안하고 함부로 뛰어들었다가 두 손 들고 도망가지 말고, 일단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오래 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책임감이나 성실함과는 거리가 먼 스스로를 잘 아는 만큼, 현실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활동을 하면서, 한계를 느꼈다. 경찰감시팀에서 활동 기획이 필요할 때도 같은 팀의 상임활동가에게 모든 고민을 떠넘겼고, 현장에서 직접 행동을 하는데도 직장인으로서의 한계가 있었다. 잠시 상임활동으로의 발전을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 기득권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시간은 열심히 할애했지만 남은 건 다른 활동가들과의 친분뿐이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글을 읽다 가슴 철렁하는 표현을 보았다. '운동을 가지고 사교를 하는 사람'

아마 3월 15일에 평택에 내려간 것은 그런 자괴감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어느 정도는 충동적이었지만, 기본적인 계산은 이미 끝나있었다. '만약 경찰에 잡힌다 해도 전과도 없고 딱히 격렬한 행동을 하지도 않을 것이니, 훈방이나 벌금 정도일 것이다. 마침 다니던 회사는 잠시 쉬는 중이니,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 평택 대추리에 국방부가 고용한 용역깡패와 까마득한 수의 경찰병력이 들어온 3월 15일, 나도 내려갔다가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호송차에 태워질 때는 좀 암담했고 조사받을 때도 내심 떨렸지만, 그리 큰 걱정은 하지 않았고 유치장에서 이틀 만에 나왔다. 그렇게 활동의 고민을, 몸으로 대신 때웠다.

나오면서 두 가지를 되뇌었다. 손쉬운 방법을 택해놓고선, 뭔가 대단한 결의를 가지고 한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지는 말자. 이것으로 나는 할 만큼 했다며 발 빼지 말자.

그러나 4월 7일, 더 많은 용역과 경찰이 또다시 대추리를 메웠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나는 빠지고 싶었다. 가야한다는 생각과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혼재된 채, 무작정 평택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결론 내리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했고, 그래서 가긴 가되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내 암묵적 방침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경찰은 아무것도 안한 나를 잡아갔다. 그리고 검사가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다행히 실질심사에서 풀려나왔지만,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유치장에 있는 동안, 점점 나빠지는 상황을 예상하고 미리 미리 힘들여 심적 대비를 했기에 면회 온 사람들에게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하루 종일 벽을 향해 돌아누운 내 머릿속은 온통 '이래야 했을까, 저래야 했을까' 같은 이기적이고도 헛된 생각뿐이었다. 실질심사는 부끄러움의 극치였다. 현재 구치소에서 구속적부심을 기다리고 있는, 장도정씨의 최후변론은 대추리 주민들이 다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최후변론은 표면적으로는 '나 같은 사람도 분노할 만큼 대추리의 상황은 부당하다'였지만 실제로는 '나 이런 사람이니까 잘 봐 주세요'였다. 판사가 여섯 명을 놓고 누굴 구속시킬까 정치적 저울질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기득권과, 그 자리의 다른 사람들에게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운동경력을 뭔가 시민운동 같은 근사한 빛깔로 포장해서 내놓았다. 나는 그것이 부끄럽고, 지금도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아마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것이 부끄럽다. 그날 방청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나에겐 다행이었다.

어쨌거나 다시 회사를 다니게 되었지만 활동은 계속할 것 같다. 아직 나는 내가 나아지기를 바란다. '어떻게'는 여전히 막막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