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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지뢰 깔린 들판을 지나는 심경

10월이면 북인권 담당자로서 활동한 지 꼭 1년이 된다. 97년 인권운동사랑방에 들어와 영화제 담당자로서 활동한 이후 한 번도 ‘보직’을 바꿔본 적 없는 나에게 인생의 중요한 변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변화란 언제나 아무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법. 이번도 결코 그 법칙에 어긋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북인권 활동을 하고 싶다거나, 할 수도 있다는 ‘꿈도 꾸지 않았던’ 나는 사랑방 중점사업의 담당자가 되고 말았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북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처럼 정세적으로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소위 ‘자유주의적 인권관’을 극복하고 ‘참다운 자유’를 보장하는 진보적 인권관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북과 같은 사회주의 인권에 대한 이해와 접목은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연구에 몰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90년대 후반부터 기아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한 북인권 문제는 최근 3-4년 동안 국내뿐 아니라 국제 인권 무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세계 도처에 북인권에 관심을 가지는 수많은 행위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에 다수는 ‘때려잡자 공산당’을 좀 점잖게 표현하고 있는 행위자들로 ‘북인권을 위해 북을 붕괴해야 한다’는 호전적인 논리를 내세우며 반북을 외치고 있다. 그 중 골목대장은 단연 ‘미국정부’다. 작년 북인권법을 만들어서 공세를 시작하자 일본과 남한의 우익들도 그 뒤를 잇고 있다. 정부뿐 아니다. 미 보수 우익의 상당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며 이들에게 북은 악의 축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이단자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사랑방이 벌여왔던 북인권 사업은 사실 이들의 공세를 파악하고 그것에 대응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다. 북인권에 대한 실질적인 이해나 증진을 위한 활동은 아직 시작도 하지 못한 채 외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싸움꾼들을 상대하는 것은 피곤하게 계속되는 비생산적 활동인 경우가 태반이다.

북인권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 해법에 대한 스펙트럼의 다양함도 북인권 활동의 질곡이 된다. 호전적 행위자들에 대한 대응이야 차라리 깔끔하다. 진보 진영 내부에서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은 다양한 의견과 해법은 북인권 사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이다. 북을 ‘우리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은 하나’라고 강하게 끌어안는 측이 있는가 하면, 한반도라는 지리적·역사적 공존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측, 그리고 인권의 보편성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측까지 각양 각색의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심지어 사랑방 내부에서조차. 민족이라는 안경을 벗고 북을 그야말로 ‘쿨~’하게 대한다고 해도 북은 나에게 ‘남이 아닌 남’ ‘타자가 아닌 타자’임에는 분명하다. 이러한 입각점에서 과연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북은 나에게 미스테리한 애인과도 같다. 그는 전화연락도 잘 되지 않는다. 그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속수무책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의 집에 찾아가는 것도 아무 때나 가능한 게 아니다. 그는 은밀히 초청하거나 아니면 성대한 파티를 연다. 그의 일상은 과연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있지만 그에게서 확인할 수는 없다. 그가 어렵다면 얼마나 어려운 건지, 시급히 지원해야 할 부양가족은 얼마나 되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가 큰소리치는 것만큼 그의 미래는 그렇게 자신만만한 것인지…. 이런 관계가 지속된 지도 꽤 됐지만 이러한 미스테리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별을 선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난제들이 지뢰밭처럼 놓여 있는 들판을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북인권 대응활동이 아닌가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