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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규격화된 인간 이념형

며칠 전에 갓 제대한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했다. 나만 빼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군대에 가 같은 날 제대한 친구들이었다. 거의 2년 만에 만나는 자리라서 서로 굉장히 반가웠다. 군대가서 좀 변한 듯한 친구도 있었고 그대로인 듯한 친구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친구'인지라 그런 것들은 별로 상관없었다.

분위기가 대충 무르익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같이 농구를 하던 선배 두 명이 왔다. 그 때부터 분위기가 좀 이상해졌는데, 조잘조잘 활발했던 지방방송들이 줄어들고 선배들을 중심으로 한 중앙방송이 점차 발언권을 독점해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중앙방송 진행자들은 매 프로그램이 끝날 때마다 농구 팀의 구호를 외쳤고 그러면 우리는 다함께 술을 들이켰다.
그 중앙방송이 탄생되는 과정은 아주 단순했다. 선배 두 명이 오자마자 갓 제대한 내 친구들은 그들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엄청나게 받들어 모셨다.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말을 걸었고 나를 비롯해서 '관계정리'가 아직 안된 친구들을 소개해 올리기도 했다. 그러면 선배는 자대의 위치나 군대내 보직 등 남자의 것들을 -그쪽은 반말로 묻고 난 존댓말로 대답하면서- 확인해 나가며 서로의 관계를 확인하고 정리했다. 거기서 나와 내 친구들은 수동적 발언자에 불과했다. 왠지 능동적으로 이것저것 물으면 안될 것 같았다. 일방적인 소개가 끝나고 몇 가지 중앙방송 진행자의 흥겨운 멘트가 끝난 후 후배들은 구호의 선창은 농구팀의 역사와 전통을 더 많이 함께한 선배가 해야 한다는 제의를 했고 선배는 그 제의를 받아들여 구호를 선창하면서 중앙방송의 위치를 확고히 해갔다. 이런 분위기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선배에 대한 ‘아랫사람’으로서의 열렬한 지지가 필요했는데 내 친구들은 그 역할들을 아주 익숙하게 해냈다.
한편 술을 잘 못 마시는 난 매번 거국적으로 원샷을 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못마시는 척을 좀 했더니 옆에 있던 또 다른 선배가 아주 관대한 표정으로 못 마시면 마시지 말란다. 그 선배 덕분에 나는 합법적으로(?) 꺾어 마실 수 있다는 느낌에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좀 이상한 게 단순히 그 말 한마디로 그 선배의 그런 식의 관대함이 아주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내 친구들은 그 선배의 그 점만은 꼭 평가해줘야 한다는 어투로 그 선배의 관용적인 점을 칭찬했다. 물론 바른 건 칭찬해줘야 하지만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그렇게 떠드는 게 너무 불공평해보였다. 그리고 무엇이 과연 내 친구로 하여금 이렇게 능동적으로 그 선배를 칭찬하게 만들었냐는 생각을 해봤다.
군대와 같은 계급이 뚜렷이 구별되고 상하간 폭력적 관계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곳은 필연적으로 권위주의를 탄생시키는 것 같다. 이런 권위주의는 권위의 적용대상을 상당히 규격화시킨다. 그 대상이 욕구하는 바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나도 때로는 군대에서 새로 온 신병이 자신만만한 행동을 하거나(‘신병인 주제에 얼어있어야지!’) 뭔가를 꼬치꼬치 캐묻거나(‘신병이 무슨 궁금한 게 그렇게 많아?’) 하면 그것이 별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심기가 불편했던 경험이 있다. 결국 난 세상에 참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관계맺음을 해야 한다는 걸 까먹고는 선임들에게 추상적으로 남아있는 후임의 규격화된 틀을 그에게 덮어씌우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들을 잘라버리려고 노력하거나 최소한 마음으로 불편해한다. 이렇게 규격화된 상은 현실에 존재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인격과는 다른 어떤 대상으로서 순수한 형태의 ‘인’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이념형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이런 식으로 권위에 의해 규정되고 규격화된 피지배자에 대한 이념형처럼 피지배자들은 그들을 규격화시키는 권위의 시선들을 그대로 내부화해서 반대로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위의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것과 관련된 경험이 있다. 한번은 부대 후임으로 내 고등학교 친구가 들어왔는데 그 친구와 나와의 관계설정을 군대 내의 선후임관계로 하느냐 아니면 고등학교 때 친구였던 것을 고려해서 우리 둘 관계만 예외적으로 친구관계를 인정하느냐를 가지고 선임들의 충고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난 친구 앞에서도 선임병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불합리하게 느껴져 선임병들에게 친구관계를 처음부터 인정받으려 했다. 하지만 선임병들의 충고 -일정기간이 지날 때까지 선임병으로서 대하라는 충고- 들이 예상대로 대충 비슷했다. 하지만 그 중에 이상했던 것은 모두가 하나같이 충고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물론 상관없는데 다른 선임병들 눈이 있으니...’라는 말을 꼭 붙였다. 나도 처음에는 맞다고 생각하며 들었는데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니까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도대체 누가, 어떤 선임병이 내 친구와 친구하겠다는 데 문제제기를 할 것인가. 그런 선임은 내 생각에는 우리 부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 도대체 ‘다른 선임병’은 누구란 말인가.
처음에는 단순히 그 선임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것 역시 군대 선임이라는 것에 대한 이념형이 그 선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념형이 자기 스스로를 규율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나에게 충고를 한, 실질적으로 권력이 있는 선임병의 욕구도, 내 친구의 욕구도, 나의 욕구도 전혀 고려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술자리에서 그 선배에게 과도한 칭찬을 보낸 갓 제대한 친구들의 행동의 원인도 그들이 가진 권위의 이념형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군대에서의 선임과 같은 권위였어야 할 그 선배의 그런 관용에 그것을 높게 평가해야할 당위성을 느꼈으리라.
내가 군대에 있으면서 조금 변한 게 있다면 관계맺음이 참 단순화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군대는 기본적으로 나보다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으로 나누어져서 높은 사람에게는 그 단순한 구별하고 다르게 대하는 것이 강요된다. 그래서 ‘사회’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관계맺음이 단순하지만 명확한 두개의 구별의 관계맺음으로 수렴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두 극단의 관계들은 모두 군대에서 형성된 낮은 사람에 대한 이념형과 높은 사람에 대한 이념형에 기반하는 것이라서 나와 타인, 그 누구의 욕구도 고려되지 않는 철저히 소외된 인간관계다.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범하는 이해못할 행동들이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 같다. 곧! 복학을 앞둔 입장에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