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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가의 편지

[자원활동가 일기] 잊혀진 전쟁, 잊혀지지 않을 기억들...

자원활동가가 부딪혀 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1. 에필로그

이미 잊혀진 전쟁이 되어버린 한국전쟁 동안 100만명의 민간인이 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학살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서슬퍼런 냉전반공체제 하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빨갱이의 후손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숨을 죽이면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광폭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마땅히 토벌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던 수많은 민간인들. 그들은 대부분 이 땅에서 땅을 일구고, 흙과 함께 숨을 쉬던 평범한 민중들이었습니다. 또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어느 한 편에 발을 딛고 서 있어야만 했다는 이유로, 한 마을 전체와, 일가족 전부가 그렇게 죽어나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포성이 멈추고 반세기가 지나도록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릴 수 없었던 유족들. 아직 한국전쟁의 "또 다른 전쟁". 민간인학살의 문제는 끝나지 않고 오늘의 문제로 남아있습니다.

  "나야 역사를 전공한다고 하지만, 형은 왜 민간인학살 문제에 관심이 있는건가요?"

처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한 대응 활동을 시작하면서 상임활동가 분에게 이러한 우문을 던지기도 했었습니다. 애초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순전히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라는 저의 위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유족분들을 만나고 이 문제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회단체 활동가 분들을 만나면서 이건 단순히 활자로 씌어진 역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가 단지 강의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요즘 들어 가슴에 와 닿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대응 활동을 통해 또 다른 양태의 가슴 속 무언가를 남기게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처음에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던 것처럼 아직까지 제대로 치유해 보지 못한 오늘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풀어내고 있지 못한 채 어느 순간부터 화석화되어버린 우리 인권의 시원적 성격의 문제에 대한 가슴 답답함이 어느 한 켠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안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거창. 굴절된 현재 진행의 역사..
민간인학살 유족 및 활동가 수련회를 위해 거창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신 여러 유족 분들의 한 맺힌 사연도 듣고, 민간인학살 관련하여 활동 방향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요.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날 거창 신원면 학살지 방문이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사건 중 그나마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거창에서는 지금 어마어마한 규모의 위령사업지가 건설중입니다. 무려 200억원이 투입되었는데, 현재 다 완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위용(?)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창양민학살" 이라고 알려져 있는 거창 신원면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국군 11사단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 1000여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입니다. 당시 전시 국회에서도 이 사건의 심각성을 알고 조사를 나갔더니만, 은폐, 조작에 급급한 국군은 조사를 나온 국회의원들에게 인민군 복장을 하고 위협사격을 가하는 등 실태 조사 자체를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4.19 이후에서야 유골을 수습하고 위령비를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뼈를 맞출 수가 없어서 남자, 여자, 어린아이의 묘 이렇게 세 기의 합동 묘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는 묘를 훼손하고 위령비를 정으로 쪼고 부수는 등의 폭거를 저질렀고, 유족회 분들을 용공혐의로 구속하기도 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이후 다시 묘를 복원하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그곳에는 봉분이 두개만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아이들을 죽였을 리 없다"라는 명분 하에, '아이들 묘는 복원하지 않겠다'라는 조건을 내걸고 묘역 복원을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거창 신원면 합동묘역에는 훼손된 위령비와 봉분이 깎여 평평한 땅으로 남아있는 소아 묘가 있습니다. 그 굴절된 우리의 역사적 현장 앞에는 200억이 투입된 변질된 위령사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의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점을 찾아내지 못한 채 또 다시 화석으로 전시되는 순간을 보는 듯 했습니다. 그 때 어느 유족분들의 "우리가 원하는 건 저런 게 아니지"라는 나지막한 혼잣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만 같습니다.

#3. 내가 만나 본 유족분들
강화도 안학섭 할아버지께서는 본인의 좌익활동으로 말미암아 가족들이 학살당한 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마 유골이 여기에 묻혀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들 뿐, 유골 확인도 못했다고 합니다. 강화 유족회 서영선 회장님께서는 남들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 갯벌로 끌려가 학살당한 일을 떠올리게 되어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고만 하십니다. 다른 유족들처럼 어디에 묻혀있다는 추정도 할 수 없고, 바닷물에 쓸려 내려간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차마 떠올리기도 싫다라고 하십니다.
고양 금정굴 유족회의 서병규 회장님께서는 나이가 들어서 귀에 보청기를 끼고 계십니다. 잘 안 들리셔서 왠만한 얘기는 다시 한번 확인해서 말씀드려야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 인공치하에서 둘째 형님이 부역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위의 두 형님과 아버님이 금정굴 구덩이에서 학살 당한 아픔을 현재까지 가지고 살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연세와 마음속 깊은 한과는 달리 천진한 웃음을 지니고 계십니다. 가끔씩 절 툭툭치시면서 장난도 하시고 말이죠. 얼마전 전경들과 대치 도중 "너희들 선배들이 우리 가족을 죽였어"라고 소리치실 때는 제 가슴까지 미어지더군요. 이 분들의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그동안 가져온 한이라도 풀고 편히 지내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어르신들의 천진한 어릴 적 웃음. 전쟁으로 그 웃음이 잃어버린 그 순간 이전으로 다시 되돌려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순전히 제 욕심일까요?

#4. 우리가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
"인권운동사랑방의 박유민입니다."
민간인학살 대응활동을 하면서, 수도권지역 민간인 학살지 순례사업을 기획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저도 사랑방의 당당한 활동가로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소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랑방의 누구입니다 라고 말하는 저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안면을 트게 되면, 사실 지금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밝히게 되었구요.
비록 학부생이긴 하지만, 지금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라는 저의 현실 자체가 이 문제를 접하게 되면서 부끄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단순히 학문적인 접근으로는 풀 수 없는 오늘의 문제를 이러한 활동을 통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구요. 그래서, 좀 더 치열해지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사랑방에서, 그리고 민간인피학살 유족분들을 만날 때 부끄럼이 없을 정도로 말이죠.... 끝으로 한홍구 선생님의 다음 글로 마무리를 대신할까 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왜 내가 하필 이 문제를 붙잡고 골머리를 앓아야 하나 하고 후회할 때가 종종 있다. 머리로 이해하기 힘들고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에도 너무나 무거운 문제이고, 그렇다고 사료가 풍부한 것도 아니라면 사실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아니 도망가려야 도망갈 데가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런 문제이다. 유족들은 호소한다. 학살의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부디 이 땅의 풀 한포기 함부로 밟지 말아달라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는 가족들을 가진 이들에게는 온 국토가 그들의 무덤이라고. 온 국토에 학살의 흔적이 널려 있고, 현대사의 거의 모든 사건이 학살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