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의 편지

공간의 성격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오랜만에 상임활동가 편지를 씁니다. 편지라는 게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말을 걸어야 하는데 오늘은 누구를 생각하며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전에 쓴 편지들은 후원인분들에게 고민을 나누기보다 ‘저는 이렇게 살아요’라는 편지라 편하게 쓸 수 있었는데 함께 나누고픈 고민을 쓰려니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고민이 됩니다.

오늘은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후원인을 생각하며 글을 건넵니다. 후원인 분들은 오늘 어떤 공간에서 하루를 지내셨나요? 저는 와우산 사랑방 사무실에 앉아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들 사무실, 집, 학교, 거리등에서 하루를 보내셨겠지요? 그곳에서 오늘 무엇을 하며 보내셨나요? 어떤 의미를 가진 채 하루를 지내셨나요?

우리가 하루의 대부분을 살아가고 있는 어떤 공간은 나에게 돈을 버는 공간일 수도, 휴식을 취하거나 공부를 하는 곳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 그 공간이 가진 의미이자 성격입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 공간의 성격을 다르게 규정합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 공부 잘하는 학생이 되도록 교육하는 학교, 병을 치료하는 병원 같은 공간의 성격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여한 성격보단 사회가 부여한 성격에 충실한 공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간의 성격에 대한 같음과 다름으로 인해 때론 내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최근 한 가지 인터뷰를 진행하고 하나의 인터뷰 내용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 인터뷰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학교를 생각하면 교사와 학생의 존재를 먼저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일하는 조리노동자, 과학실 교사, 행정노동자, 사서노동자는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에는 교사와 학생 못지않게 많은 수의 노동자들이 함께 있습니다. 교사와 공무원을 제외하곤 모두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그들의 존재는 왜 학교를 떠올리면 별로 생각나지 않을까요?

학교에선 교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주류 교육학에서 교직은 인간을 가르치고 기르는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칭합니다. 교직은 국가와 민족에 큰 영향을 주고 사회진보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칭합니다. 교직에 종사하는 교사는 진리를 가르치는 신성한 역할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학교에서 교사는 가장 중요한 존재로 인정 됩니다.

이 같은 성격에서 학생과 학교 비정규직노동자들은 학교의 부수적 존재가 됩니다. 무엇을 결정하지도, 선택하기도 어렵습니다. 자신이 일하는 학교이지만 학교에서는 일하는 사람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쉽게 잘리고, 내가 이곳에서 13년을 일했다 말을 해도 인정받지 못합니다. 학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의 학생은 번호로 불리고, 올바르고 바른 인성(??)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배제되고 밀려납니다. 학습의 주체라고 불리지만, 학생은 학교의 성격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규정한 학교의 성격에 의해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배제됩니다. 큰 목소리를 내면 미성숙한 존재로 지목되어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인터뷰는 병원에서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대형병원의 노동자였습니다. 인터뷰한 내용을 읽어 내리며 눈에 들어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외의 노동자들에게는 선생님이라고 부르질 않습니다. 노동자들이 무슨 씨라 부르지 말고 서로 선생님이라 부르자고 요구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선생님이란 칭호는 진료를 행하는 의사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의사가 핵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학교와도 비슷합니다. 교사는 선생님이라 불리지만 교사 이외는 보조라고 불립니다. 과학보조, 교무보조, 학교의 중심은 교사이고 나머지는 주변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중심과 주변, 핵심과 비핵심은 단지 호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병원의 경우 비핵심 업무라고 지목되는 원무과, 조리실은 외주화시키거나 비정규직으로 고용합니다. 의료직종을 제외하곤 모두 외주화시킬 수 있으니 말을 잘 들으라고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사와 행정공무원을 제외한 노동자는 비정규직으로 고용됩니다. 학생은 공부를 잘하고 모범적이냐 아니냐에 따라 학교에서 대우가 달라지고 배제됩니다. 공간에서 지목한 핵심과 비핵심에 따라 고용형태와 대우 또한 결정됩니다. 당사자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규정된 성격에 의해 지워지거나 잊힙니다.

단지 병원과 학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들을 규정하는 성격들은 그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분리됨 속에 다른 대우를 받고, 다른 위치가 만들어집니다. 배제와 차별, 불평등은 그렇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글을 쓰면서 또 다른 고민들이 생깁니다. 그렇게 밀려나고 배제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왜 소수성을 띄고 있을까? 여성이거나, 장애인이거나, 성소수자이거나, 이주민일까?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역량을 보고 점수를 더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소수자성을 찾아 내 점수에서 빼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게 노동자 ‘일반’의 모습이 요구될 때 사람들은 자신으로부터 소수자적 정체성을 삭제해야 하는 갈등에 빠진다. 숨길 수 있다면 숨겨야 한다. 숨길 수 없다면 그것을 대체하는 또는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어렵다면 더욱 불리한 노동조건을 받아들여야 한다.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中>

물론 이뿐만이 아닙니다. 보조적 역할이나 돌봄 노동이라 칭해지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 중 여성이나 고령자가 훨씬 더 많은 이유는 사회가 여성과 고령자에게 부여하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금 더 고민하면 많은 경우에서 보이리라 생각됩니다. 아직 이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평등예감 ‘을’들의 이어말하기에서 묻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떠한 공간, 살아가는 위치에서 지나쳐온 사람들이 보입니다. 시작해야할 지점이 생각납니다. 지워진 사람들의 목소리, 이야기, 공간의 성격을 그 소리에서부터 다시 규정하는 활동, 그리고 그곳에서의 평등. 사실 이 고민을 처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를 위해 이야기를 듣고 글을 쓰고, ‘을’들의 이어말하기를 준비하며, ‘노동차별’팀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곡차곡 쌓인 고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고민하고 저에게 들려주기도 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후원인분들에게 이야기를 건네게 된 건 활동하며 만나고 느끼고 들은 이야기들을 후원인분들에게 다시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후원인분들의 이야기를 언젠가 듣고 싶어서입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시다면 언제든 전해주세요.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함께 평등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