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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금철의 인권이야기] 인권침해가 아니다, ‘조용한 학살’이다!

부랑인이라 지목된 ‘사회의 적’을 처단한, 잔혹한 국가폭력을 보라

2016년, 어느 부랑인복지시설

‘2년 반 동안 123명 사망’. 얼마 전 언론에 크게 보도된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을 접하면서, 이 사망자 통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1958년 대구시가 부랑인시설로 설립하고 80년부터 재단법인 대구구천주교회유지재단이 위탁 운영하고 있는 희망원은 현재 노숙인재활시설, 노숙인요양시설, 정신요양시설, 장애인거주시설 등 총 네 개의 시설에 1,154명이 거주하고 있다. 희망원은 123명 사망 사실을 대부분 단순 사고 또는 원인 불명 등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1,154명이 거주하는 시설에서 2년 반 동안 123명 사망’.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 이 문장을 두고 생각해 본다. 대체 얼마나 죽은 걸까? 보통의 인구집단에선 같은 기간 동안 얼마나 사망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원이 위치한 대구시 달성군의 2012년 1월부터 2014년 6월까지 사망률과 비교해봤다. 2016년 7월 기준 인구 수 21만115명인 달성군은 해당 기간 동안 2525명이 사망했다. 현재 인구 수 대비로 1.2%가 사망한 것이다. 반면 희망원은 같은 기간 동안 10.6%가 사망했다.

이렇게 계산해 놓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흔하게 접해왔던 ‘시설 인권침해’ 문제가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일반적인 인구집단보다 10배나 더 많은 사람이 죽어나갔는데 ‘인권침해’라는 단어가 적절한가? 이건 ‘학살’이라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전시상황에서 적군을 향해 총을 겨누거나, 아우슈비츠처럼 가스실로 끌고 가야만 학살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소리 없이 외진 곳에 갇혀 단기간에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것 또한 학살이라 불러야 하는 건 아닐까?

1942 ~ 1982년, 어느 부랑아동 감화시설

잠시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보자. 경기도 안산시의 작은 어촌마을 선감도에 위치했던 선감학원(仙甘學園)은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에 설립되었다. 당시 총독부는 “8세에서 18세 소년으로 불량 행위를 하거나 불량 행위를 할 우려가 있는” 부랑아동을 감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선감학원을 설립했다. 그러나 실상 이곳에서 아동들은 20만평에 달하는 농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대동아전쟁의 전사로 일사순국(一死殉國)할 인적 자원”을 만들겠다는 미명하에 탄광에 끌려가기도 했다.

선감학원의 잔혹상은 해방 후 까지 이어졌다. 1946년 2월 경기도는 선감학원 시설을 이어받아 새 건물을 짓고 부랑아 수용시설로 그대로 사용했으며, 이를 1982년까지 유지했다. 방송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경찰은 부랑아가 아닌 단지 길을 잃고 헤매던 아이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 선감학원에 넘겼으며, 끌려온 아이들은 매일같이 곡괭이로 매질을 당하고 광활한 염전을 일구는 중노동에 시달려야했다. 일부 아이들은 매질과 노역을 피해 바다를 헤엄쳐 탈출하고자 했으나, 이내 거친 파도에 휩쓸려 시체가 된 채 선감도로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이 시체들은 인근 야산에 소리 없이 암매장 되었으며, 그렇게 암매장 된 시신만 수백구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최근 여러 TV 시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선감학원 사건을 보도하고 나서자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아동 인권침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러나 나는 ‘선감학원’이라는 단어 옆에 ‘인권침해’라는 밋밋한 단어를 놓기가 어쩐지 민망하다. 선감학원은 애초에 아동보호기관이 아니었고, 여기서 벌어진 참상도 단지 아동 수용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었다. 선감학원 운영규정에는 아예 운영비 대부분을 ‘농지 및 염전관리’ 등 수익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충당하게 되어 있었다. 즉, 강제노역이 선감학원 설립 목적이었으며, 수많은 죽음은 그것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던 것이다. 이 또한 ‘학살’이라는 말 외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구 달성경찰서 앞에서 희망원 수사촉구 결의대회를 하는 모습(사진출처-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 대구 달성경찰서 앞에서 희망원 수사촉구 결의대회를 하는 모습(사진출처-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조용한 학살’의 시설수용역사

여기서 굳이 ‘학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단지 더 강한 느낌을 전달하는 수사적 표현을 찾고자 해서가 아니다. 죽은 사람의 숫자가 많다는 이유로 학살(massacre)이라 부르는 것 또한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역사에서 벌어진 부랑인에 대한 학살은 이 집단 자체를 절멸의 대상으로 보는, 일종의 제노사이드(genocide)의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랑인은 복지의 대상이기보다는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일제는 당시 농촌 붕괴 과정에서 출현한 도시 부랑인을 단지 전통적 공동체로부터 방출된 ‘피해집단’이 아니라 일하지 않고 사회에 기식해서 먹고 살려고 하는 ‘기생집단’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총독부는 부랑인에 대한 온정주의적 시선을 거두고 철저한 배제와 축출로 일관했다. 이를 위해 일선 경찰의 임의적 권력 행사를 묵인하고 사실상 조장하는 사법 체계를 강화했다. 이는 1912년 3월 총독부령으로 제시된 「경찰범처벌규칙」에 잘 드러나는데, 이 규칙에선 ‘행려병자나 정신병자, 기아, 미아, 일정한 주거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 등 거리를 부랑하면서 사회질서를 크게 해치는 무리’를 30일 미만의 구류나 30원 미만의 과료에 처하도록 했다.*

이런 태도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돌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는데 1940년 4월 12일 동아일보 보도를 보면, 일제는 부랑인을 “번영하는 경성(京城)의 암(癌)”이라고 까지 표현했다. 이에 일제는 그동안 부랑인을 지역 수준에서 추방·단속하던 것에서 탈피해 선감학원과 같은 감화원(感化院)을 설치해 강제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경찰력의 이런 실천 원리는 출판/사상경찰이 ‘사상전염론’에 기초해 천황제를 부정하거나 조선 독립 사상을 견지하는 이들을 척결하는 것처럼, 의심스러운 사물이나 사람의 몸을 들여다보고 감시하는 현미경(+칼)의 역할 수행과 다르지 않았다.***

해방 이후라고 달라졌을까? 그러기는커녕 경찰력에 의한 부랑인 처벌은 더욱 악랄해졌다. 이들은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빨갱이 불순분자’에 비견되는, 사회안보를 위협하는 ‘사회의 적’, ‘도시 폭동세력’ 등으로 낙인찍혔다. 이들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마치 베트남전에서 빈민촌 게릴라의 투쟁과 같은 것으로 유비되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항쟁 등에 적잖은 도시하층민이 참여하자, 당시 정권은 이런 인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단행했다.****

또한 박정희 정부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근거가 되었던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내무부훈령 제410호, 1975년)에서도 부랑인 단속·수용·보호의 기본 임무 중 하나로 “안보적 측면에서 범법자, 불순분자 등의 활동을 봉쇄”라고 정확히 명시했다. 특히나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은 1976년 "일본의 조총련에서 부랑인으로 가장한 사람들을 남한에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는 황당한 정부 공문을 받고 나서 본격적으로 거리에서 ‘부랑인 체포’에 나섰다. 즉 이들에게 부랑인 대책이란 전장에서 ‘적’을 섬멸하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공원에서 잠을 자다가’, ‘늦은 시간까지 시내에서 놀다가’, ‘퇴근길에 난데없이’, ‘부산에 놀러 왔다 차가 끊겨 부산역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잡혀오게 된 사람이 있더라도, 이는 암세포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정상세포가 희생되어야 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 그럼 민주화된 21세기 한국사회라고 달라졌을까? 다시 대구시립희망원 사례를 보자. 이들은 하루 1만원을 받고 대학병원에서 종일 간병을, 7692원을 받고 새벽 5시30분부터 삼시세끼 밥을 했다. 이곳에서 규율을 어긴 사람은 무조건 ‘신규동’으로 보내져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다. 신규동 독방에 2주씩 갇혀 지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별 것 아닌 이유로 맞아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손으로 반찬을 가져가려 해서 머리를 맞았고, 음식을 옮기러 오라는데 늦게 왔다고 얼굴을 맞았다. 거주인의 눈을 찔러 ‘울트라맨’을 만드는 건 그저 장난 수준의 일이었다. 명백한 폭행치사가 병사로 기록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이런 일은 과거처럼 경찰이 빨갱이 때려잡듯 부랑인을 검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희망원은 엄연히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는 사회복지시설이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천사 같은’ 사회복지사들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부터 2014년까지 연속 6회에 걸쳐 우수시설로 선정됐다. 2006년에는 전국 사회복지시설 가운데 최우수 사회복지시설로 선정돼 대통령상까지 받았다.

그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 결과 2년 반 사이에 123명이 죽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녹조에 물고기 떼가 폐사했을 때만큼의 충격도 받지 않는 듯하다. TV에서는 여느 때처럼 거리 노숙인과 정신질환자를 향해 ‘예비범죄자’, ‘묻지마 살인’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붓기에 바쁘다. 불순분자나 폭도라 불리던 이들은, 이제 쾌적한 도시의 안전하고 위생적인 삶을 방해하는 불결한 존재들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오늘도 ‘조용한 학살’은 저 산골 외진 어딘가의 시설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과정이 건강하고 우월한 게르만 민족의 번영을 위해 불결하고 위험한 유대인을 향해 ‘최종해결책’을 가했던, 저 나치의 역사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희망원 사건의 해결은 이 부끄러운 역사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다. 또, 반대로 이 부끄러운 역사를 온전히 인식해야만 희망원 사건은 비로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조용한 학살’의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 한귀영, 「‘근대적 사회사업’과 권력의 시선」, 『근대주체와 식민지 규율권력』, 문화과학사, 2003, 319쪽
** 정진각, 「선감학원」, 『어린이 근로정신대를 아십니까?』, 국회의원 박선영 주최 토론회, 2010.04.27
*** 정근식, 「식민지 위생경찰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유산 - 식민지 통치성의 시각에서」, 사회와 역사 90집, 2011
**** 김원,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 - 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현실문화, 2010
***** 한겨레신문, 2016.08.26

덧붙임

하금철 님은 장애인인터넷언론 비마이너 편집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