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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교육, 날다] 청소년과 여성은 어떤 처지를 공유하고 있나?

페미니즘으로 청소년인권에 한걸음 다가서기

비청소년들과 청소년인권을 주제로 교육할 때, 특히 청소년인권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표방한 모임에서 초대받아 교육을 할 때, 나는 곧잘 ‘왜 청소년인권을 지지하는지’ 이유를 묻곤 한다. 세세한 맥락이 동일하진 않지만 대체로 ‘나의 자녀를 위해’, ‘내가 만나고 있는 학생/청소년들을 위해’ 청소년 인권을 옹호하거나 관련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룬다. 청소년은 나이로 구분되는 집단이고, 때문에 이미 청소년 연령대를 넘어선 사람들이 자신 곁에 있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청소년인권을 사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향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만 멈추는 것이 나는 불안하거나 아쉬웠다. ‘나 자신에게’ 청소년인권이 어떠한 의미인지 탐색하고, ‘나로부터’ 청소년인권을 지지하는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경계를 넘나드는 고민과 실천을 지속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청소년인권교육은 청소년들의 열악한 사회적 위치성과 인권 현실을 전하는 내용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나와 청소년인권이 무슨 상관인지’ 고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몇 년 만 버티면 미성년자 딱지 뗄 텐데…’라거나, ‘우리 애도 이제 다 커서…’라는 말을 남기며 홀연히 떠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라고 붙잡기 위해 다양한 서사와 논리들을 구성해왔다. 지난 6월, 서울 노원 지역에서 활동하는 청소년노동인권교육 활동가들과의 만남은 그러한 시도들 중 하나였다.

교육을 의뢰하신 분과 통화하면서 15명 정도 되는 전체 참여자 중 90% 이상이 30-40대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전부터 페미니즘을 매개로 청소년인권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성인 나의 삶을 옥죄는 사회적 압력이 청소년의 그것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청소년 인권을 억압하는 현실이 나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은 무엇일지 천천히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청소년 인권과 ‘나’의 접속

참여자들에게 “청소년인권은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 자신을 위해 청소년 인권을 옹호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간단히 포스트잇에 적어달라고 부탁했다. 몇몇 참여자들은 질문 자체가 낯설다는 점을 고백하기도 했다. 자녀가 있는 참여자들의 경우, ‘내 자녀를 위해’를 내려놓고 생각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하기도 했다. 개별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드린 후, 적어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청소년 시기에 겪었던 일들(체벌을 비롯한 폭력)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는 것’이라는 대답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 자신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언어로서 청소년인권이 갖는 의미를 보여준다. ‘거리에서 담배 피는 청소년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대답은 ‘무서운 10대들’로 청소년들을 집단 대상화하는 사회적 시선이 내가 타인을 기꺼이 환대하지 못하는 감각을 형성하는 데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하게 한다. ‘자녀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기 때문에’라는 취지로 대답을 해주신 분께는 질문을 되돌려 드리기도 했다. 청소년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때 부모와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어떻게 봐야할지를 묻고, 자녀의 행복과 자신의 행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엄마’들에게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맥락 역시 간단히 짚었다.

참여자들의 활동 결과물을 살펴보는 동시에 나의 이야기도 보탰다. 비청소년인 내가 여전히 ‘청소년 정체성’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이유는 비혼/여성인 나는 스무 살을 넘겼지만, 사회적으로 여전히 ‘청소년 취급’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 성숙과 미성숙의 단계적 이분법을 유지하고, 특정 집단은 본디 미성숙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사회에서 ‘아직 결혼하지 못한’ 나는 늘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한편, 미성숙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은 여성인권의 역사이기도 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연약하고, 미성숙하기 때문에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인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는 여전히 여성을 ‘이등 시민’의 위치로 전락시키곤 한다. 특별한 보호는 흔히 통제로 기능하고, 여성이 동등한 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한다. 참여하고, 실수하고, 경험을 쌓는 과정으로부터 밀려나면 실제로 그 존재는 ‘미성숙해지거나’, ‘미성숙해보이기’ 쉽다. 이 악순환의 과정은 청소년 인권의 현실과도 상당히 일치한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정상성과 기준을 의심하고, 기준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을 ‘여성의 또 다른 얼굴들(이름들)’로 발견하는 것. 페미니즘이 청소년인권에 다가서는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몇 가지 사례와 장면들을 함께 살폈다.

당연의 세계를 죽여라

정희진이 “‘인종 역할’, ‘계급 역할’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러나 성역할(gender role)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것은 성차별이 부정의가 아니라 지켜야 할 규범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일상 속 차별과 폭력은 ‘역할’과 ‘본분’의 모습을 하고 우리 삶을 옥죄는 경우가 많다. 이는 청소년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학생다움’, ‘학생의 본분’으로 여겨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자 참여자들은 “단정한 머리와 교복, 교칙을 잘 지키는 것,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 등을 꼽았다. ‘성역할’과 ‘여성스러움’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면, ‘학생다움’ 역시 당연한 것이 아닌 강요된 역할임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여성들이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임을 주장했던 것처럼, 청소년 인권의 출발점 역시 ‘우리도 인간’ 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아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학생은 학생다울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패러디 포스터는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비틀고 있다.
사진 출처-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 사진 출처-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당연의 세계를 거부한 여성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한 페미니스트가 남긴 명언에 빈칸을 뚫어 즉석에서 단어를 채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 ) 에 간다.” ‘지옥에 간다, 법원에 간다’ 등으로 예시를 들어 이야기하다 원문의 글자 “어디든”을 화면에 띄우자 교육장 안에 미묘한 해방감이 감돌았다. 책 읽는 여자를, 생각하는 여자를, 말하는 여자를, 행동하는 여자를 남성/세계는 두려워했다. 시키는 대로 살기를 거부한 여성들은 ‘위험한 여자들’로 여겨졌고, 흔히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거나 ‘미친년’, ‘마녀’라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비난의 표식 뒤에는 그러나 자유가 있다. 삶의 지향을 자신들 스스로 만들어가길 주저하지 않은 여성들이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처럼, ‘착한 어린이’와 ‘모범생’의 틀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삶의 길을 선택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이는 꼭 의식적이며, ‘똑똑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청소년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기준 삼아 모범과 비행을 판단하는지 자체를 의심해야 청소년들의 선택과 삶 그 자체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청소년인권은 가능할까?

페미니즘 입문서로 많이 읽히는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의 원제는 <Feminism is for everybody> 이다. 여성주의는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다는 말일 텐데, 이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며, 전략적으로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여성을 억압하는 세계에서는 ‘남자답지 못한’ 남성들 역시 고통 받으며, 그렇기에 연대의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처지 혹은 위치의 차이를 ‘둘 다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라고 뭉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긴장과 갈등 지점들을 가리는 효과를 낳으며, 여성들을 참을성 없는 불평분자로 만들어버린다.

청소년 인권 문제에서도 마찬가지 접근법이 필요하다. 여성과 청소년이 공유하는 처지가 있다고 해서 서로 같은 위치에 서 있다고 곧장 말할 수는 없다. 이를 테면, 고3 교실에 붙어 있는 ‘엄마가 보고 있다’는 급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양육에 대한 책임이 온통 여성에게 전가되어 있는 현실에서 ‘엄마’는 자식들을 향한 통제자/억압자로서의 위치를 강요받는다. 자신 인생의 대부분을 자식들을 통제하고 닦달하는데 써야만 하는 엄마들 역시 어떤 의미에선 구조적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강요된 엄마 역할일지언정 ‘현실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해서도, 억압을 실행하고 구현하는 자신의 주체성과 권력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페미니즘은 나 자신을 돌아보는데도 도움을 주는 언어다. 사회가 여성을 억압해왔던 방식과 언어를 내가 다른 존재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하여 폭력의 협력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여성과 청소년이 함께 자유로운 삶을 꿈꾸며 ‘같은 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늘 열려 있지만, 그렇게 쉽게 ‘같은 편’이 될 수는 없다. 두루뭉술한 원론적 지지를 유지하기보다는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쟁점들에 대해 깊이 벼려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볼 필요도 있다.

사진 출처-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23§ion=sc1§ion2=%BC%BA%C2%F7%BA%B0 (일다 기사)<br />

▲ 사진 출처- http://www.ildaro.com/sub_read.html?uid=7423§ion=sc1§ion2=%BC%BA%C2%F7%BA%B0 (일다 기사)


참여자들과 위쪽의 입간판을 함께 보며, 보호의 울타리가 얼마나 허망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나눴다. 여성들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비꼬며 ‘오빠는 필요 없다’를 외치게 되는 맥락이 드러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지켜줄 수 있다는 구도 자체가 이미 힘의 비대칭을 의미한다. 보호의 대상으로 규정된 존재들은 말할 수 있는 자리,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리에서 뒷전으로 밀려나 버린다. 심지어 지켜줄만한 자격을 상실했다고 여겨지는 이들은 손쉽게 내쳐지기도 한다.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직접 말과 행동을 보태는 청소년들이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어른들이 지켜주자.’는 식의 구호를 줄곧 비판해온 것도 유사한 결로 의미를 짚을 수 있다. 여성들이 ‘오빠는 필요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청소년들은 ‘어른은 필요 없다’고 외칠 수 있지 않을는지 참여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꼰대는 사라져야 하지만 좋은 어른은 필요하다’는 취지의 이야기들이 가장 많이 등장했다. 어떤 조건을 갖춘 사람을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지, 좋은 어른이 되고자 가랑이가 찢어지기 이전에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청소년들과 서로 기대어 살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등을 이야기 나눴다. 참여자 중 한 분은 ‘어른은 필요 없다’라는 말을 불편하게 느끼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부터 비롯한 것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다고도 하셨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데 그게 뭐가 나빠?’가 아니라, 어른이 가질 수 있는 권력 자체를 의심하며 스스로의 위치를 가늠해보고자 하는 그녀의 여정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덧붙임

한낱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