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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인권이야기] 안녕, 우토로

지난 주말 우토로 마을에 다녀왔다. 우토로를 포함해 재일동포의 삶을 알리고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던 지구촌동포연대(KIN)에서 프로그램을 준비해주셔서, 곧 철거가 시작되는 우토로 마을의 마지막 모습을 돌아보았다.

교토의 재일조선인 마을인 우토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정부가 군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 1,300명을 동원하면서 형성되었다. 허허벌판인 토지 한가운데 노동자들이 살기 위한 임시 합숙소인 판잣집들이 들어선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노동자들은 식량 배급이 중단된 채 그 자리에 방치되었고, 여러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은 우토로 마을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보상은커녕 군 비행장 건설을 맡았던 군수기업 닛산은 우토로 토지를 주민들 몰래 매각해버렸고, 주민들은 토지 명도소송과 강제철거의 위협에 시달려왔다. 그 후 한국 시민사회의 모금과 노력, 한국 정부의 기금 조성으로 우토로 토지의 1/3을 다시 매입하여 주민들은 계속 마을에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부터 마을을 정비하는 재개발 사업이 시작되어, 기존의 건물들은 모두 철거된다.

처음부터 우토로 주민들의 요구는 "지금 있는 그대로 우토로에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차별, 조국의 무관심 속에서 주민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다. 아픈 시간을 함께해온 마을에서 있는 그대로 살고 싶다는 것이 주민들의 바람이었다. 토지 매입으로 다시 우토로에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재개발로 결국 '있는 그대로' 살 수는 없게 되었다. 지난 5월, 인근의 공공주택으로 1차 19세대가 이사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기존 집들이 모두 철거되고 몇 년 후 새 건물이 들어서면 이들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될 예정이다.

우토로 마을주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 우토로 마을주민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다들 떠나가고, 멀리 가시고, 이런 날이 아니면 만나기 힘들어서 아쉽고 쓸쓸합니다." 먼저 이사하신 분들은 같이 어울려 살던 가족, 이웃들과 떨어져 사는 걸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강경남 할머니는 1차로 이사를 떠나 오랜만에 만나게 된 조카들을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생전 처음 하는 '이사'가 주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평생 살아온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많은 걸 포기하고 강제로 바꿔야 하는 일이다.

"일본놈과 서양놈이 싸우면 불 나오는 걸 던졌어. 우리 옆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그걸 맞았어. 몸에 불이 다 붙었는데, 나랑 우리 어머니는 그냥 보고 있었어. 우리가 움직이면 비행기가 또 던질까봐 못 갔어."

우토로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재일조선인 1세대인 강경남 할머니는 아직도 전쟁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소이탄과 폭격을 피해 여기 우토로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해주셨다. 전쟁과 식민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토로 옆의 군 비행장은 일본의 패전으로 완공되지 못했지만, 해당 부지는 자위대 기지가 되어 현재 공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오쿠보 공병부대는 평화유지군(PKO)으로 해외에 파병되었던 최초의 자위대 부대이기도 하다. 파병과 같은 외국 군대의 군사적인 개입도 그곳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빼앗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경남 할머니는 <무한도전> '배달의 무도' 편에 나왔을 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셨다. 마을 한 바퀴를 혼자 돌 수 있을 정도로 최근 건강을 많이 회복하셨다고 한다. 방송 이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찾아왔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행복해하셨다는 후문이다. "사람의 관심이라는 게 참 그렇게 힘이 셉니다" 건강을 회복한 강경남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우토로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김수환 동포센터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마을 정비 사업이 끝나고 우토로 주민들이 다시 안전하게 이주하는 날까지, 재일조선인 마을로서 상징성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한국에서도 꾸준한 관심과 응원이 필요하다.
덧붙임

수영 님은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