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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여덟살 구역] 책언니와 세월호: 노란책 읽은 날

책언니에서 처음 ‘세월호’ 얘기를 했던 건 아마 작년 4월, 참사가 있고 얼마 안 지나서였다. 그땐 애들이 아홉 살이었다. 이 말은 곧 애들이 10분 이상 제자리에 그냥 앉아있는 법이 없을 때였다는 소리다. (물론 지금도 쉽지는 않다.) 그런데도 그날은 “너희들 세월호 소식 들었지?”라는 우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후에 길게 이어지던 다소 무겁고 어려운 이야기들을 잠자코 들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TV만 틀면 사라진 언니 오빠들의 소식이 흘러나오고, 어른들도 모였다 하면 세월호를 이야기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던 때였으니, 아홉 살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아주 나쁜 일이 벌어지긴 했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는 어린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복잡한 슬픔이었다. 4월 16일 이후, 배가 가라앉는 4일의 시간 동안 매일 소주를 마시면서 뉴스를 봤다던 우리 아빠 같은 어른들이 있는가 하면, 아는 오빠가 세월호에 타고 있었다며 유명인을 안다는 듯 자랑삼아 말하는 민주(가명)같은 아이들도 있었다. 민주는 아는 오빠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보다는 처음 가본 장례식장을 더 신기해했다. 누군가의 죽음, 그로 인한 슬픔. 책 속의 글씨처럼 자신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감정들을 아직은 이해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경험의 부재에서 오는 무감각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민주를 보면서 어린이라 불리는 나이대의 사람들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해를 나눈다는 게 당연한 말이지만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고마워요, 노란책!

그 만만치 않을 일을 진짜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올 여름 무렵, 안전과 존엄을 위한 4.16 인권선언 추진단에 합류하게 되었고, 덜컥 책언니에서 풀뿌리토론을 해보겠다고 말을 꺼내긴 했는데 막상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검색창에 무작정 세월호를 검색해서 영상을 보고, 인터뷰와 기사를 읽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아도, 좀처럼 ‘풀뿌리토론 열 살 버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게 <노란책>, 어린이책 만드는 분들이 엮은 세월호에 관한 그림책이었다. ‘4.16 세월호 그 후’라는 제목의 공동창작 그림책은 PDF파일로 공개되어 있었다. 노란색 빳빳한 A4 용지에 고이 프린트하고, 말투와 내용을 애들 들려주기 좋게 살짝 수정했더니 제법 읽어주기 좋은 모양새가 되었다.

우리가 수업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수업이든 애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들 수 있는 에피소드 형태를 통해 내용을 담으려고 애쓸 때가 많다. 정보 위주, 설명조의 말들은 애들의 무관심 철벽에 반사되서 귀에 닿기도 전에 사방으로 흩어져버린다. 세월호 참사의 경우 가뜩이나 뉴스 앵커가 들려주는 해설이나 신문 논평 식의 어려운 정보들만 머릿속에 가득 차있어서 열 살짜리 애들한테 세월호가 어떤 일이었는지를 설명하는 것부터가 막막했다. 헌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려줘야 할까?’ 먼저 고민했던 분들이 있었던 덕분에 첫 단추를 쉽게 꿸 수 있었다.

풀뿌리토론을 마치고

▲ 풀뿌리토론을 마치고


풀뿌리토론에서 욕이 폭발하네

노란책에서는 시간 순으로 ‘416, 이후 벌어진 일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방식이 참사 동안 벌어진 여러 부조리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었는지, 노란책을 읽던 날에는 매일 딴 짓하던 애들까지 빠짐없이 모여들었다. 신기할 정도로 다들 집중해서 듣는 바람에 읽는 나도 얼떨떨했다. 근데 잘 진행된 건 딱 여기까지였다. 이날 제대로 한건 이 노란책 읽기 딱 하나 밖에 없었다. 정작 중요했던 토론의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토론이 지루했던 몇몇 애들이 날뛰기 시작하면서 화산처럼 와르르 폭발했다가 빠르게 식어버리고 말았으니까.

다음은 이날 나눈 풀뿌리토론의 일부다.

1. 세월호를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들어?
“언니, 오빠들 숨을 못 쉬어서 힘들었겠다. 언니, 오빠 부모님 슬프겠다.”
“야! 우리 어린이다. 우린 어쩌냐?! 만약 그 일 또 일어나면 어쩔거냐.”

2. 세월호 이후 벌어진 일들 중에서 가장 “말도 안 돼!” “너무했다, 나빠!” 싶었던 일은?
“왜 해경들이 그거밖에 바다에 안 들어갔음? 나쁘다. 미쳤다.”
“박근혜 때문인데 박근혜가 눈물 흘림. 클라스 보소~ 미친 년.”

3. 세월호 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라앉은 배를 왜 안 꺼내지? 너라면 죽었는데 바다에 빠졌는데 안 꺼내면 좋겠냐?”
“그딴 대통령 안 뽑기, 방송 그따구로 내보내지 않기.”

사실 나는 진작 풀뿌리토론을 끝냈지만, 이 결과를 공유하지는 못 했다. 위에 적어둔 건 조금 얌전한 답변들이고, 다른 건 내용들이 좀 더 세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욕으로 가득한 속기록을 읽고 나니, 차마 남들 보라고 내놓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개중에는 잔혹동시로 한참 이슈가 된 적 있던 이순영 시인의 시 ‘솔로강아지’의 패러디 욕도 있었다. (박** 눈깔을 파먹고 심장을 간장에 찍어먹고 삶아먹고 구워먹어) 1번 질문부터 3번 질문까지 질문 내용과 상관없이 다들 욕하는 재미에 흠뻑 빠지는 바람에 우리의 풀뿌리토론은 정체불명의 결과물을 낳고 말았다. 남들처럼 멀쩡한 토론이 될 리가 없지. 예정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하하하.

정말로 싫은 것

애들은 1학년 때부터 야금야금 욕을 배워서 2학년 때부터는 자유자재로 쓰기 시작했다. 한 번은 그날 읽은 책 내용을 바탕으로 퀴즈대회를 하기로 했다. 팀을 2팀으로 나누고, 정답 구호 대신 팀 이름을 외치기로 했다. 그랬더니 한쪽에서 팀 이름을 욕으로 정했다. 예를 들면 ‘빨간팀!’ 대신 ‘씨발!’을 외치는 식이다. 애들은 이 퀴즈대회 내내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정답 맞출 생각이 없는 애들도 구호는 외쳤다. 책언니 하면서 애들이 욕 하는 걸 막아본 적은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욕을 쓴다는 건 그만큼 일상적으로 쌓이는 스트레스와 분노가 있다는 뜻이고, 아동‧청소년들이 쓰는 욕은 매일 억눌린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쓰는 욕에는 정확한 대상이 없다. 나를 억누르는 세상에 대한 막연한 분노의 표출…. 욕으로 가득했던 열 살들의 풀뿌리토론에서도 비슷한 걸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애들이 정말로 화를 냈던 대상은 현직 대통령일 수도 있지만, 꼭 그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 애들이 접한 것은 노란책에서 들은 이야기 정도였고, 박근혜나 해경 나쁜 놈 등의 반응은 전래동화를 읽고 전형적인 악당들에게 보이는 반응과 비슷했던 것도 같다. 아이들은 경험이나 정보의 절대량이 부족한 만큼 익숙한 틀(전래동화의 선악구도 등)을 통해서 사회적 사건을 단순화해서 받아들인다. 그 단순함 속에서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자신들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건에 대한 세세한 이해 대신 현실의 ‘나쁘고 부당한 부분’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점에 반응한다. 정말로 무관심했다면 그날 그렇게 날뛰면서(?) 포스트잇에 노란책에 나온 나쁜 놈들에 대한 욕을 열정적으로 써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정말로 위험한 것은 무엇인가?

이 수업을 준비하면서 전체적으로 가져갔던 핵심은 애초에 세월호 참사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세상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이곳은 어린이들에게도 충분히 살기 좋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싱글맘인 엄마가 일을 나가면서 아이들이 있는 집의 문을 바깥에서 따로 잠그고 가는 바람에 화재가 일어나 변을 당했다는 사건을 들은 적이 있다. 혼자 몸으로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에게는 문을 잠그고 가는 선택이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이 정말로 바깥의 위험이기만 할까? 그들의 삶에 언제든 자물쇠를 채울 수 있다는 어른들의 발상이야말로 어린 사람들의 세상을, 삶을 더 위험한 곳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가 굳이 어린이들과 풀뿌리토론을 하면서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쪽에 가까웠다. 물론 중간에 엎어져서 뒷 얘기를 못 하긴 했다만, 앞으로도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 아마도?
덧붙임

엠건 님은 교육공동체 나다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