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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반복 재생되는, 희생하는 부모 이야기

동화『마당을 나온 암탉』를 읽고

동화『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사계절)이 2000년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벌써 15년이 흘렀다. 아동문학으로는 드물게 150만 부가 판매되었다고 하고 20여 개 국가에도 번역되었다고 한다. 2011년에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서 큰 인기를 끌었고, 검색을 해보니 최근에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상연되었다. 다양한 형태로 반복 재생될 만큼 이 이야기가 그렇게 매력적인가?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10여 년 전 처음,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마당을 나온 암탉’이라고 하는 제목에 끌렸다. 책 제목만 보고 내 멋대로 해석했다. ‘마당’과 ‘암탉’을 부엌과 여성, 집과 여성을 대표하는 상징이라 생각했다. 여성이 부엌 밖으로 나오다니, 여성이 집 밖으로 나오다니. 우리 사회가 부여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려나 하고 상상했다. 그런데, 스토리는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주인공 암탉 잎싹이 마당을 나온 이유는 자기 힘으로 아기를 직접 키워 보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니! ‘엄마’가 되기 위해 ‘마당’을 나온다고?

‘암탉’을 성급하게 ‘여성’으로 치환하지 않고 단지 ‘암탉’만의 생태계로 보았을 때, 출간 당시 이 책이 가지는 ‘비판적’ 의미는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인간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기계처럼 ‘알’을 생산하는 양계장에 살고 있는 ‘암탉’이 제 스스로 알을 품고 새끼를 낳아 기른다고 하는 상상은 획기적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자기 스스로 낳은 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청동오리 친구의 알을 품고 낳아 키운다. 그 과정에서 주변 동물들에게 차별을 당하고 시련도 겪는다. 스토리만 놓고 보자면 반생명적인 축산 시스템에 대한 반기이기도 하며, 편견에 대항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만으로 『마당을 나온 암탉』이 가진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찜찜함이 남는다. 바로 잎싹이 가진 초월적 ‘모성’ 탓이다.

정글 같은 세계를 견디는 유일한 관계로서 ‘엄마’와 ‘아기’

잎싹을 둘러싼 세계는 무척 차갑다. 닭을 생명으로 보지 않는 양계장 주인뿐이 아니다. 마당에서 살고 있는 다른 동물들도 잎싹을 차별한다. 어울리고 섞이는 관계가 되지 않는다. 마당은 ‘닭장’에서 살다 나온 암탉 잎싹이 희망하던 세계였지만, 그 세계는 잎싹을 환영하지 않았다. 게다가 잎싹은 다른 암탉이 알을 낳고 품는 것을 보고 ‘우울증’까지 걸린다. 마당에만 위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 처음부터 끝까지 잎싹을 쫓아다니며 생명을 위협하는 족제비도 있다. 닭장, 마당, 바깥 어디에도 잎싹이 안전하게 마음 둘 공간이 없다.

그런 비참한 일상 속에 잎싹은 유일한 친구 청동오리의 알을 대신 품게 된다. 오랫동안 정성들여 알을 품어 아기가 태어나게 된다. 잎싹은 직적 품어 얻은 아기를 데리고 다시 ‘마당’으로 들어간다. 자신만의 아기를 자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웃음만 당한다. 닭이 ‘오리’를 데리고 왔기 때문이다. 수탉은 결국 ‘꼴불견 암탉과 아기 오리 처리 문제’를 거론하는 등 잎싹과 오리를 쫓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잎싹은 위협을 느끼고 자기를 따르는 아기를 데리고 조용히 마당 밖을 나가기로 마음먹는다. 어쩔 수 없이 마당을 나가지만 잎싹의 의지는 결연하다. “발톱에 힘을 주고, 부리를 굳게 다물고, 눈을 부라린 채 앞만 보면서 마당을 떠났다.”

이 장면이 바로, 잎싹이 ‘마당을 나온 암탉’이 되는 순간이다. 잎싹이 이렇게 갑자기 결연한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닭장에 갇히기 전에, 아기가 날개를 잘리기 전에” 나가야하는 상황에서도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굳게 먹고, 어둠 속을 걸어 나가’게 되는 것. 안전한 공간을 얻기 위해 애썼던 잎싹이 그렇게 ‘마당’을 쉽게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진짜 자기 편, 자기만의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정글 같은 세계 속에 잎싹과 아기만이 서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이 되어 버린다. 잎싹을 지켜 주는 힘은 무엇일까. ‘모성’이 아니고 다른 이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목만 보고 추측했을 때는 마당을 나온다는 것이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한 ‘성역할’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를 읽어 보니 그 반대로 잎싹은 마당을 나오며 자기를 지킬 유일한 힘으로 ‘모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이야기를 단지 자본주의 반생태계적 시스템에 대한 도전,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고만 보기 힘들게 만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안에서 모든 동물은 어머니, 아버지, 자식이라는 정체성으로 표현된다. 닭이 오리 아이를 ‘키운다’고 하는 설정만으로는 뛰어넘어 버릴 수 없는 관점이 내재되어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통해 우리 사회 ‘가족’, ‘여성’, ‘어린이’의 문제를 생각해 보게 된다.

희생하는 부모의 등장

『마당을 나온 암탉』은 단지 ‘엄마’와 ‘모성’만을 말하지 않는다. 잎싹이 키우는 아기 ‘초록머리’의 아빠도 자식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는 존재로 나온다. “청둥오리는 알이 곧 부화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조용히 목숨을 내놓은 게 분명했다.” “너야말로 훌륭한 아버지야!”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잎싹을 위협하는 족제비도 마지막 장면에서는 아기를 위해 헌신하는 ‘엄마’로 전환된다. 잎싹은 “언뜻 보인 배와 젖꼭지”를 보고, 족제비가 네 발 가진 ‘물컹한 어린것들’의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닭장에서만 살아 온 잎싹이 포유류인 족제비 신체적 특성을 그렇게 잘 알고 있다는 것에서 싱거워졌다. 족제비가 자기 식욕을 채우기 위해 다른 동물을 위협하던 존재에서, 자기 자식을 위해 먹이를 찾아 헤매는 엄마로 전환된다. 잎싹의 시선이라기보다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족제비를 본 것은 아닐까. 족제비가 ‘적’에서 ‘모성’을 가진 ‘엄마’가 되면서 독자의 감성이 전환된다. 일종의 어떤 ‘감동’을 만들어내는 장면이다.

마지막 장면은 그 ‘감동’을 더 격앙시킨다. 오리 아기 초록머리가 자기 무리 속으로 날아가는 ‘독립’을 하고 나서, 잎싹은 족제비 새끼를 보았던 느낌을 떠올린다. “부드럽게 느껴지던 살덩이”. 그것은 “잎싹이 마지막으로 낳았던 알처럼” 느껴진다. “자. 나를 잡아먹어라. 그래서 네 아기들 배를 채워라”라고 하며 자기 몸을 족제비에게 내준다. 잎싹이 자기와는 상관없는 청둥오리의 엄마가 되어주었고 잘 키워 독립까지 하도록 도와주고 나서 마지막 순간에는 또 다른 ‘아기’, 족제비의 ‘아기’를 위해 자기 몸을 아낌없이 희생한다. 다 주고도 또 다 주는 ‘희생’하는 엄마상이 완성된다. 어쩌면 이 장면은 자기 자신과는 관련 없는 생명을 위해 연대하는 장면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아기’와 ‘엄마’를 강조하는 서술은 잎싹을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어머니상’과 짝을 짓도록 만든다.

또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영화『국제시장』을 보며 주인공이 살아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고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아버지상’을 재현하는 관념의 덩어리로 보여 내내 불편했다. 실제 인물이라면 겪기 힘든 각종 다양한 시대의 시련을 한 인물이 감당하며 ‘자식을 잘 키워냈다’. 여러 다양한 구조의 문제, 정치의 문제는 사라지고 희생하는 아버지만 남는다. 그런 ‘아버지’가 만들어내는 ‘감동’과 ‘눈물’은 그 ‘아버지’가 극복해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심연 속에 묻어 버려 위험하다.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자기 아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청둥오리 아기를 키웠으며, 다른 아기를 위해 목숨까지 내어 놓는다. 여기서 만들어진 감동과 눈물은 어머니의 희생 앞에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아기는 자라서 다시 아버지나 어머니가 된다. 그리고 또 다시 그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그 자식은 또 어머니 아버지가 되고 또 희생하고. 영원히 그런 관계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걸까?

린드그랜 작품 중에『라스무스와 방랑자』라고 하는 작품이 있다. 고아원에서 자라던 한 소년이 자기와 함께 살 부모를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라스무스는 방랑자로 살고 있는 남성 어른 오스카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야기 마지막에 결국 좋은 양부모를 찾게 되지만, 라스무스는 오스카를 따라 나선다. 오스카를 ‘아버지’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라스무스와 오스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로 설명할 수 있지만, 실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맺는 과정에 더 가깝다. 오스카와 함께 떠나겠다고 하는 라스무스에게 오스카가 말한다. “나도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어. 나도 너랑 함께 있고 싶어.” 사람은 사람이 필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잎싹과 초록머리는 희생을 다하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일 수밖에 없었을까. 희생하는 부모 앞에 저항하는 자식은 ‘철이 들지 않은’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독자는 어린이다. 어린이 독자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보며 느끼게 되는 감정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마당을 나온 암탉』이 15년이 넘도록 스테디셀러가 되는 것이 나는 조금 많이 아쉽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만든 감동은 스토리가 이끈 힘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반복해온 ‘모성’의 힘이다. ‘모성’을 가진 잎싹이 단호하게 마음을 먹고 자기 몸을 기꺼이 내주는 것. 그것만이 이 서사를 설명할 수 있는 힘이다.

희생은 권위와 연결된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른 권력이 공고하다. 어린이가 어른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여전히 ‘싸가지 없는’ 일이다. 모성과 희생에 근거한 서사가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어 재생산 되는 것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잎싹과 작별할 수는 없을까. 여러 다양한 이야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부모 희생의 서사를 뛰어 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권위주의’의 장벽을 명쾌하고 통쾌하게 꿰뚫는 지점으로 돌파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로 세상을 바꾸자는 거대한 요청은 아니다.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상상’의 가치를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 안에 오랫동안 내재된 감성을 반복하는 이야기 말고 “달성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말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억압하는 가장 가까운 존재로서 ‘어른’에 대한 새로운 접근, 어디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