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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네 방앗간] 텔레비전에 레즈비언 나와서 정말 좋았네, 정말 좋았네

내가 처음으로 바지교복을 입었던 건 추위 때문이었다. 아무리 두꺼운 스타킹을 신어도, 겨울 칼바람이 불면 ‘도대체 어떤 놈이 여자들은 이 겨울에도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정했나!’ 라며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의 3대를 저주하면서 이를 갈았던 나에게, 컴퓨터 활용 교육 시범학교와 성교육 시범학교(순결서약이나 낙태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성기 모형을 두고 콘돔 사용법을 알려주던,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성교육이었다.)를 거쳐 여학생에게 ‘자유의지에 따라’ 바지교복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바지교복 시범학교를 시행한 교장은 구세주였다. (지금이라면 그 교장 선생님께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헤시태그를 붙여주고 싶다.)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 행복함, 바지 안에 어떤 두꺼운 속옷을 입어도 누구도 모른다는 그 사실의 따스함에 꽂혀 바지를 입고 간 다음날, 내가 마주한 최초의 반응은,

“네가 드디어 여자이기를 완전히 포기했구나.”

였다. 충격과 혼란. 물론, 바지교복을 입기 전에도 나는 숏커트에, 치마를 입고도 복도를 전력 질주하고 창틀을 뛰어넘는 소녀-언이었다. 그러나 명백하게 이(異)성의 카테고리로 이루어진 교복-입기에서 위아래를 믹스한 순간 조금 활동적인 ‘여자애’에서 ‘?’ 물음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분명 우리에겐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는데 정작 선택을 한 사람은 나 하나였고 나는 남학생의 상징인 바지교복과 여전히 내가 남학생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여자 교복 자켓을 입고 무엇도 아니면서 그 모두인 채로 그 해 겨울을 보냈다.

출처: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페이스북

▲ 출처: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페이스북

여자화장실이나 여탕에서 사람들이 나를 남자로 인지하고 매번 깜짝깜짝 놀라는 걸 재밌다고 생각하고, 온라인 채팅방에서 내 말투를 보고 남자인 줄 아는 사람에게 굳이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확인시켜주면서 말투로 성별을 구분하는 사람을 놀리고, 폴라티를 입고 목을 가리고 모자를 써서 인상을 가리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채로 셔츠를 입고, 사람들이 나를 카테고리화하다 혼란을 겪는 동공을 바라보면서 웃고, 왜 여자로서는 남자에게 성애의 대상이 아닌 대상으로서 인식되지 않고 여자에게는 키스를 퍼부으면 안 되는지를 질문하고 다니는 나는 폭력에 노출되지 않은 매우 운이 좋은 청소년 양성애자였지만 당시에는 이런 내가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설명하지 못해 혼란스러웠다.

지금도 그 혼란의 시기에 하리수 씨가 나온 도도 화장품 광고를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 태어난 (병원에서 명명해준) 성별-내가 인지하는 성별 정체성-타인이 나로 인식하는 성별 정체성-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성별 정체성-나의 성적 지향의 연결고리가 남과 ‘다를 수 있다’는 것과 그런 다름에도 ‘이름’이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이 나 이외에도 ‘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첫 순간. 고립되어 있던 세상에 길이 나는 순간이었다.

무엇이, 누구에게, 불건전인가

지난 2월과 3월 여고생 간의 키스 장면이 나왔던 JTBC 드라마 <선암여고 탐정단>은 “청소년들이 보기에 불건전했다”는 내용의 민원이 접수되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의 심의 대상이 되었다. 여고생 간의 키스장면을 담은 드라마가 “(동성애를) 권장·조장할 수 있다”, “소수자들은 다수와 다른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등의 성소수자 혐오발언의 총집합체였던 방심위 현장을 보면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것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온다.

출처: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페이스북

▲ 출처: 무지개행동 이반스쿨 페이스북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의 이반스쿨에서 2012년 7월 서울시에 사는 성소수자 255명을 대상으로 조사․분석한 <서울시 성소수자 학생인권 실태조사>에 따르면, 학교에서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 ‘매우 심하다’고 답한 비율은 16.6%, ‘심하다’고 답한 비율은 37.7%이었다. ‘보통이다’라고 응답한 이는 29.32%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76.6%가 자살을 생각한 적 있으며, 58.5%가 실제로 자살을 시도해 봤다고 밝혔다.

비이성애자에게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은 꼭 연동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애자는 매우 분명하게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 이(異)성의 성별 정체성을 요구한다. 성소수자 혐오에는 비이‘성애’의 실천만이 아니라 이(異)성애의 전제가 되는 이(異)성의 카테고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한국청소년개발원이 2006년 청소년 성소수자의 생활 실태조사를 한 연구보고서에서 만 13세부터 만 23세까지의 청소년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남자나 여자 같다고 놀림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이 78.3%에 달했다. 이는 성소수자 혐오가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이(異)성의 경계를 흩트리는 것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異)성의 경계를 흩트리는 것, 비이성애의 관계, 심지어는 성애를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청소년을 다루는 것 모두 불건전으로 읽는 맥락에서는 이러한 불건강이 읽히지 않는다. 일상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손을 잡고 키스하고 섹스하는, 일을 하러가고 공부를 하고, 이웃과 만나고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존재로서 성소수자가 계속해서 드러날 때 보호와 혐오의 논리 속에서 힘들어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더 많은 방송에서 성소수자의 존재가 등장하길 희망한다.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공전의 히트를 쳤던 드라마 <연애시대>의 엔딩에서 주인공 이성애자 커플이 아닌 배경이었던 서점에서 레즈비언 커플이 손을 잡고 미래를 이야기하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던 것처럼. <선암여고 탐정단>에서 여고생의 키스를 삭제하지 않았던 것처럼.
덧붙임

나기 님은 언니네트워크 운영지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