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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자기만의 세계를 그리는 시간

『짖어봐, 조지야』『왜요?』

“애가 애 같지 않다고 해서…”
초등학교 때 내 일기장을 몰래 보다가 들킨 엄마의 변명이었다. 엄마 말인 즉 학교에서 담임선생님 면담을 했는데 내가 종종 애 같지 않은 이야기들을 일기에 쓴다는 말에 궁금해서 잠깐! 살펴봤다는 것이다. 안방에서 일기장을 들고 내 방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훑어보았더랬다. ‘나는 오늘~’로 시작해 ‘참 재밌었다.’로 끝나는 뻔한 날과 친구들과의 사건, 사고로 인해 복잡한 감정과 고민의 말들만이 수북이 쌓여있는 날, 그야말로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기‘꺼리’가 있는 날들이 들쑥날쑥 이어졌다. 이 중 뭐가 애 같지 않았던 걸까? 나름 진지하게 일기톤을 점검했었다. 초등학생답게 어떤 고민과 이야기들을 했어야 했던 걸까?

학생답게 단정한 옷차림, 학생다운 헤어스타일, 여자다운 말투와 태도, 아랫사람이면 아랫사람답게 갖추어야 할 예절 등 그때그때 많은 ‘다움’을 요구받았다. 대개 이런 요구는 어른이 아이에게, 지위나 계급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로 권력을 따라 흐른다. 그래서인지 그 기준을 갖추지 못하게 되면 따가운 눈총을 넘어 여러 종류의 제재들이 행해지기 마련이다.

개답지 않은 개, 조지
개답게 ‘멍멍’ 하고 짖지 않는 조지(『짖어봐 조지야』(줄스 파이퍼, 조숙은 옮김 / 보림))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아무리 ‘멍멍’이라고 가르쳐도 이상한(?) 소리를 내는 조지 때문에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짙어가고, 결국 엄마는 의사선생님을 찾아가 치료를 부탁한다. 의사 선생님 앞에서 ‘야옹~’이라고 짖자 의사선생님은 조지 입속으로 깊이 손을 넣어 고양이를 꺼낸다. ‘꽥꽥’하고 짖자 다시 조지 입 속으로 깊이깊이 손을 넣어서 오리를, ‘꿀꿀’하고 짖으면 돼지를, ‘음메~’하고 짖으면 소를 꺼낸다. 드디어 조지가 ‘멍멍’하고 대답하자 치료는 완료된다.

어른들은 성장발달단계라는 세상의 매뉴얼을 따라 아이들이 성장하기를 기대한다. 때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가장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 기대와 믿음이 아이를 통해 실현되지 않을 때 마음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불안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더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하면 위험해지므로 문제를 제거하거나 문제행동에 대한 교정 혹은 치료가 필요하다. 개답지 않은 조지를 걱정하는 엄마 역시 조지에게 왜 그렇게 짖는지 묻기보다 의사선생님을 찾아가 문제를 제거하는 게 우선이다. 치료를 통해 자신이 문제라고 여기는 일이 해결되자 비로소 환한 웃음을 짓고,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했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다. 하지만 이미 조지는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이가 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어른들의 기준이 아닌 자기만의 세계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숱한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서 조지가 얼마나 개다운지 자랑하고 싶은 엄마에게, 어쩌면 자신을 길들이려고만 하는 세상에 이렇게 답한다. “안녕.”

원래 그런 거라고?

세상이 궁금한 아이답게 ‘왜요?’라고 호기심을 발동해도 어른들의 골칫거리이긴 마찬가지이다. 『왜요?』(린제이 캠프 글, 토니로스 그림, 바리 옮김/베틀북)의 릴리는 ‘옷 입어야지.’ ‘달걀이 익으려면 조금 기다려야겠는걸., ‘릴리, 그만 자야지’라고 말하는 아빠에게 항상 왜요? 왜요? 왜요....!라고 묻는다. 너무나 당연한 일들을 자꾸만 되묻는 릴리 때문에 아빠의 머리는 지끈지끈...

그런데 아이들이 혹은 우리가 ‘왜요?’라고 질문할 때는 언제일까? 때로는 논리적 사실관계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싫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지 않을까. 비가 와 젖은 잔디에 앉으면 바지가 젖을 게 뻔 하기 때문에 아빠는 앉지 말라고 하지만, 그깟 바지가 젖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앉지 말라는 하는 걸까 싶은 릴리는 왜 앉으면 안되는지 납득이 안 될 수밖에. 나름 열심히 릴리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만 아빠는 끊임없는 질문공세에 ‘그냥 그런 거란다!’라고 두 손을 들고 만다. 두 손을 들고 뛰어가는 아빠의 뒷모습마저도 릴리는 왜 그러는지 궁금했을 것 같다.

‘그냥 그런 거’라는 어른들의 대답이 사실은 대답일 수 없음은 갑자기 나타난 어마어마한 우주선과 외계인이 이야기해 준다. 몹시 험상궂어 보이는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아, 맘껏 떨어라! 우리는 너희 지구를 파괴하러 왔다!”고 큰 소리로 외친다. 여섯 칸으로 구분된 한 페이지 가득 입을 막고 눈을 가리며 벌벌 떨고 있는 어른들이 그려지고, 다음 페이지의 릴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묻는다.

“왜요?”
“왜냐고? 그게 우리의 임무다.”
“왜요?”
“보잘 것 없는 별을 없애버려야 우리 위대한 외계 제국의 이름이 빛나기 때문이다.”
“왜요?”
“왜냐하면… 그건 위대한 황제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왜요?”
“그냥, 우리 황제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잖아. 이 지구 꼬맹아.”

릴리의 질문에 당황한 외계인들은 잠시 상의를 한 뒤 릴리에게 다가와 말한다. “너는 황제께 매우 버릇없는 질문을 했다. … 이제 우리는 고향별로 돌아가 그 일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거다.”라고.

아빠도 외계인도 사실은 ‘그냥’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실은 아이들을 설득시킬만한 혹은 어른 스스로도 그러하다는 확신이 없어서는 아닐까. 외계인들이 자신의 임무라고 믿고 멀리서 지구를 공격해왔지만 황제의 명령 외에는 왜, 무엇을 위해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모호하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어떤 규칙, 질서 혹은 원래 그런 거라고 이야기하는 많은 것들처럼. 한 때 ‘차들은 오른쪽 길, 사람들은 왼쪽 길’을 노래하며 좌측통행을 실천했는데 지금은 우측통행이 선진문화라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한다. 질서는 태초에 그랬던 게 아니라 학습과 반복 속에서 거대하게 성장한다. 당연한 것이 정말 당연한 거 맞아? 물을 때 가려졌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른에게도 아이의 눈과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왜? 외계인은 맨 날 지구를 정복하러 오는 존재로만 표현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외계인과의 조우는 사람들이 낯선 문화, 사람을 대할 때 보이는 태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 낯선! 외계인을 만나기도 전에 이미 험상궂게 생긴, 지구를 파괴하러 오는 존재로 인식되고 굳어져 버리면 우리가 어떻게 낯선 사람을 환대하며 평등한 관계에 대한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지구인이 달과 태양계가 궁금해서 우주로 날아가듯 역시 지구별이 궁금해 ‘그냥’ 여행하는 우주인의 방문도 괜찮지 않을까.

덧붙임

묘랑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