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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판타지의 세계~ 그런데 어딘가 익숙한 상상!

오카다 준의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판타지’라고 하면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처럼 스케일이 웅장하고 모험으로 가득한 이야기가 먼저 떠오른다. 화려하게 만들어진 영상 덕에 이젠 상상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하여튼 판타지하면 볼만한 액션과 무시무시한 긴장감을 주는 이야기가 생각나기 마련인데, 용과 마법이 등장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판타지가 있다.

오카다 준의 이야기책에도 용이 등장하고 때로는 쥐와 사람이 대화를 한다. 사람들이 돌로 굳는가 하면, 마법 같은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되기보다는 ‘혹시 있을 수도 있는?’것 처럼 다가오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누구나 상상해봤을 법한 조금은 익숙한, 그래서 무척 반가운 판타지 말이다. ‘에이, 용이 나오는데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오카다 준의 판타지에 한 번 들어와서 용과 학교 쥐와 마법사를 두루두루 만나보길~ 낯설지 않은 상상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영영 돌로 굳게 놔두지는 않으니까!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

어릴 땐 친하게 지냈지만, 초등학교 6학년인 지금은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가 돼버린 유키와 나. 둘은 우연히 방과 후 학교 교실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용을 물리치는 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제럴드를 만난다. 연극 단원쯤으로 여겼던 제럴드가 진짜 용을 물리치는 기사라고 느껴지는 순간, 제럴드가 맞서 싸우고 있는 불을 뿜는 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실 한 가운데에서!

오카다 준은 용을 물리치는 사건, 말하자면 용이 얼마나 굉장한 동물인지(무섭거나 어떤 대단한 능력을 지녔거나 등등), 기사가 어떤 검술과 기술로 용을 물리쳤는지, 또 어떤 현란한 싸움이 전개됐는지에 대해서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불을 뿜는 용이 등장하지만 그 용은 ‘온갖 사악한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제럴드와 용의 존재를 계속 의심하는 ‘나’를 동조하며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마침내 용과 만나기를 작가는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법』에서는 용과 싸움보다 ‘용과 직면하는 과정’이 중요해 보인다.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는 시작(누구나 같을 수는 없지만)이 화장실 슬리퍼를 정리하는 뜬금없는 행동일 수 있는 이유도 용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조금은 끄떡여진다. 사람의 마음을 느끼는 것하고 용을 물리치는 것은 매우 관계가 깊으니까.

15년이 흐른 후.
‘..(그때) 학교의 분위기가 좋아진 기분이었다. 그때는 용을 물리쳤기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니까 학교의 나쁘고 싫은 점이 다 모여 있는 용을 물리쳤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 그날 제리가 물리친 것은 나와 유키 사이에 있었던 어색하고 서먹한 감정과 긴장과 가식으로 뭉쳐진 용, 나와 유키가 교실에 갔기 때문에 나타난 용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래, 용을 물리치는 기사가 되었니?” 내가 물었다.
“응, 돼가고 있어.” 유키가 대답했다.
나는 썩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오카다 준의 판타지가 낯설지 않은 상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현실의 문제와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이와 청소년에 대해 이해가 깊은 작가의 경험이 주는 익숙한 고민 말이다. 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는 작가의 특성은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

이야기에 나오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육중한 미끄럼틀은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없게 된지 오래다. 이런 미끄럼틀이 있던 일본도 꽤 오래전, 바로 30년 전에 쓴 이야기인데 놀랍게도 조금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없다. 그것은 판타지의 특성이 아니라 계몽적이지 않는 관점이 책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스카이 하이츠 맨션 201호에 혼자 살고 있는 예순쯤 돼 보이는 아마모리 씨.’
‘키가 크고 얼굴이 기름하고 안경을 끼고 파이프 담배를 즐기고, 연중 검은 옷만 입는 사람’
‘동물도 식물도 기르지 않고, 말도 없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는 사람, 초콜릿을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은... 사람’

어느 날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모여 비를 피하던 스카이 하이츠 맨션에 사는 아이들 10명은 같은 맨션에 사는 아마모리 씨가 ‘혹시 마법사인가?’ 생각하게 된다. 저마다 아마모리 씨와 있었던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놓다 보니 ‘혹시’하고 잊고 지냈던 생각이 혼자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전학과 이사로 시무룩했던 데루오에게 “여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며 마법 같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하게 해줬던 아마모리 씨. 하지만 아마모리 씨는 감사 인사를 받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는다. 계획했던 바다여행을 가지 못해 혼자 놀이터에 앉아 있던 이치로에게 준 열쇠는 바다로 향하는 문을 열게 해주었고,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엄마에게 화를 내고 잠든 유키가 한 밤중에 깨어났을 때 손을 잡아 준 그림자도 아마모리 씨였다. 아니 그럴 것이라고 유키는 생각한다.

오카다 준의 이야기 속 아이들은 어렵고 혹은 무섭고, 힘든 갈등을 마주고 하고 있다. 누군가는 별거 아닌 소소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카다 준은 그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아마모리 씨를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손을 잡는 작은 행동에서도 사려 깊은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따뜻하게 다가가면서도 어른에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질문을 던지는 현실을 딛고 선 판타지인 것이다.


“다들 아마모리 씨를 알게 된 것 같다고 했지만, 난 아이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
미끄럼틀 아래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데루오가 한 말이다. 오카다 준 역시 환상적인 이야기를 전한다기보다는 아이들 일상의 고민을 풀어내고 싶었던 것이겠지.

동화를 읽다보면 “어릴 때 읽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하는 책이 있다. 물론 지금 읽어도 ‘좋구나’ 하지만, 이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어린이였을 때 읽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마저 드는 이야기. 오카다 준의 이야기가 꼭 그렇다.

덧붙임

고은채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