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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대집행의 눈속임에 넘어가지 말자

분향소가 철거되었다. 2012년 4월 5일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우리에게 남긴 죽음들을 기리기 위해 서울 대한문 앞에 만든 분향소가 지난 4일 철거되었다. 새벽녘 기습적으로 진행된 철거 소식을 뒤늦게 듣고 황망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문득 2011년 8월의 서울역 노숙인 강제퇴거 조치가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한국철도공사는 서울역이 ‘공공’의 공간이므로 ‘선량한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노숙인들을 내쫓겠다고 말했다. 공공의 공간이라는 이유가 누군가를 내쫓는 이유가 되는 역설을 마주해야 했다. 모두의 것이므로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서울역을 한국철도공사는 마치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인 것처럼,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을 내쫓을 권한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중구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행정대집행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분향소를 철거했다. 도로는 ‘공공’의 공간이므로 ‘선량한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하는 천막은 불법 시설물이라는 이유였다. 불법 사람, 불법 시설물……. ‘불법’이라는 딱지는 ‘공공의 적’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 말을 통해 ‘법’은 단지 법이라는 이유로 ‘공공’을 자임하게 된다.

중구청 직원들이 대한문 분향소를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하고 있다.

▲ 중구청 직원들이 대한문 분향소를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하고 있다.


행정대집행법의 눈속임

행정대집행법은 1954년 제정되어 한 번도 개정된 적 없는 A4용지 한 장짜리 법이다. 그런데 이 한 장짜리 법이, 미군기지를 확장하겠다며 대추리 주민들을 내쫓는 데에, 강정에 해군기지를 짓겠다며 삶의 터전을 짓밟는 데에, 두물머리에서 이어져 온 농민들의 역사를 파괴하는 데에 사용된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법이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을 정도로 논란이 없었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법이 비어 있다는 것이다. 행정대집행법은 아무 내용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법이 된 것이다.

행정대집행은 법에 따른 어떤 의무를 의무자가 이행하지 않을 때 그것을 ‘대신’ 집행하는 것이다. 이때 어떤 행위를 ‘대신’하기 위해 지켜야 할 절차 등을 규율하는 것이 행정대집행법이다. 행정은 ‘대신’할 권한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묘한 눈속임이 생긴다. 행정청이 무언가 ‘대신’하는 순간에 바로 법이 정하는 의무가 탄생하는 것이다. 중구청이 노동자와 시민들을 ‘대신’해 천막을 철거하겠다고 계고하는 순간, 천막은 ‘불법시설물’이 된다. 행정청은 무엇을 불법이라고 규정할 권한이 없는데도, 마치 천막을 철거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었던 것처럼 바뀐다.

그런데 중구청은 천막이 불법이라며 철거하고 그 자리에 화단을 설치했다. “천막농성장을 철거하기 위한 임시시설물”이라며 화단 설치를 정당화했다. 행정청이 도로를 관리할 의무가 있다고 해서 도로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런 행태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집회나 시위, 농성을 막기 위해 도로에 화단을 설치하거나 조형물 또는 의자들을 놓는 행태. 법이 해도 된다고 하지 않은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법’으로 몰면서, 법이 하지 말라고 명시하지 않은 행정청의 모든 행위는 ‘합법’의 자격을 얻는다.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한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분향소가 철거되기 전, 활동가와 문화예술인, 시민, 노동자들이 함께 예술품과 꽃밭을 만들고 있는 모습(사진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 분향소가 철거되기 전, 활동가와 문화예술인, 시민, 노동자들이 함께 예술품과 꽃밭을 만들고 있는 모습(사진 출처 : 민중언론 참세상)


거리는 우리의 장소

최창식 중구청장은 “국운을 일으켜 세울 지도자께서 구청장까지 일으켜주시니 감사합니다.”라는 트윗 멘션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전국의 수많은 행정청장들이 비슷한 마음을 품을 것이다. 그리고 행정대집행법이 보장한 ‘대신’할 권한이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인 것처럼 굴며 농성장 철거를 시도할 것이다. 최근 한 노동자가 집회 신고를 하러 경찰서에 갔다가, 경찰이 전국의 농성장을 조사하고 대책을 세우는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행정대집행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한 전국의 모든 농성장들은 철거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거리는 모두의 것이다. 우리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거리를 이용하거나 지나치거나 머무를 때 ‘거리’가 생산된다. 행정청이 도로를 관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도로를 관리하는 목적은 그것이 실질적인 공공의 장소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누구나 거리에서 말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고 춤을 출 수 있다. 사람을 만날 수 있으며 모여 있을 수 있고 함께 행동할 수 있다. 그것이 거리가 공공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눈다. 경찰이나 구청이 장소를 빼앗으려고 할 때 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연대다.

대한문 앞 분향소 역시 연대의 장소였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분향소가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죽어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혼자만의 몫으로 끌어안고 끙끙 앓지 않을 수 있었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싸웠던 사람들이 죽음에 붙들리지 않고 삶을 꿈꿀 수 있었다. 정리해고라는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현실에서 그래도 우리가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으며, 그래서 연대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공공의 질서’ 아닌가. 경범죄처벌법 따위로 지키려는 공공의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하는 공공의 질서 말이다.

다시 한 번 확인하자. 거리는 원래 우리의 장소다. 구청이 마치 자신의 장소인 것처럼, 혹은 자신들이 공공을 대신하는 것처럼 우리를 내쫓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는 하나다. “여기는 우리의 장소다!”
덧붙임

미류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