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언니네 방앗간

[언니네 방앗간] 모든 남자들은 ‘제인’을 사랑한다

얼마 전 비영리 단체와 활동가들이 모이는 어떤 행사에 참석했을 때이다. 계속 내 이름과 단체명이 적힌 명찰을 주시하던 한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 ‘언니네트워크’는 뭐 하는 곳인지를 물었다. 쉬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긴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언니네트워크는 이런 활동을 하는 여성주의 단체예요~’라고 짧게 설명해주었다.

“아… 그럼 ‘오빠네트워크’ 이런 것도 있어야 되나…?” 그 남성의 반응이었다.

물론 나는 속으로 ‘그 소리가 왜 안 나오나 했지…’ 생각하며 쓴 입맛을 다셨다. 대개 여성주의라는 건 특정한 정치의식이라고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여성주의는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그에 기반을 두고 변혁을 꾀하는 정치학이라기보다 ‘여성의 이해(利害) 추구’로 간주되기 때문에, 이 반응은 사실 ‘여성부도 있는데 왜 남성부는 없냐’는 질문(의 형식을 가장한 비난)과 동일한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입맛이 더 씁쓸한 이유는 100명의 반응이 하나같이 똑같다는 사실보다, 내 대답에 따라 남성들의 이후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언니네트워크’라는 여성단체 이름에서조차 남성(인간)인 자신이 배제되었다는 박탈감이나 오빠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는 남성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 사이를 오간다. 사실 이런 반응은 내게는 매우 익숙한 방식이었고, 묻는 사람의 성별, 나이, 직업, 혹은 질문 태도나 상황에 따라 그에 대한 대답도 꽤 여러 개 가지고 있는 편이다.

“한국사회 자체가 이미 오빠네트워크(남성연대)인데, 도대체 뭐 하러?” 비꼴 수도 있다. 유태 격언이라며 떠도는, “신은 도처에 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머니들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는데 (어머니를 추앙하는 것 말고) ‘부모됨’의 역할을 박탈당했다거나 ‘아버지됨’을 수행해야겠다는 위기감을 느껴본 적은 있는지 진지하게 되묻기도 한다. 매우 많은 순간 이런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간질간질하지만, 위의 말들을 내뱉고 난 후에 남성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왜 모든 남성을 가해자 취급 하느냐”며 분노하거나 억울해하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제일 어처구니없는 케이스는 “그나마 나 같은 (여성친화적인) 남성도 찾아보기 힘들다”거나 “그렇게 가르치려 드는 태도라면 남성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자아도취적 협박이다.

“어머, 드라마 ‘추노’ 못 보셨어요? 예전에는 남성들이 서로를 지칭하는 호칭이 ‘언니’이기도 했잖아요~ 여성단체라고 해서 여성만 있는 건 아니에요.”

종종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웃으며 이렇게 답하기도 한다. 질문의 내용을 상실한 질문(자신이 왜 그것을 궁금해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거나 질문자의 의도와 맥락이 ‘이미’ 정해져 있는 질문)을,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횟수로 대면하고 나서, 일상을 정치화한다는 건 얼마나 지난하고, 그래서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진짜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반응에 경계를 푼 상대는 호방하게 웃으며 하나같이 지금까지 자신이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에 대해서 지적하고 싶었던 문제점과 한계와 앞으로의 지향에 대해서 ‘전수’하려 든다.

모든 남자들은 ‘제인’을 사랑한다

여성 문제(이는 사실 남성 문제다)가 등장할 때마다 기본적으로 여성주의에는 동의하지만 여성주의가 현재와 같은 방법론으로는 남성들을 참여시키고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진단’과 ‘충고’가 넘쳐나는 게 한국 사회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수용할 수 있는 방식대로 내 자신과 말하기를 조정하는 것이 일종의 전략이자 협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주의 활동가인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에게 매 순간 딜레마와 좌절을 안겨준다.

결과는 대부분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는, 편협한 ‘꼴페미’로 낙인찍히는 것이다. “다른 (일반 대중) 여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페미니스트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페미니스트들이 단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지 말라”, “여성을 여성이라는 범주 하나로 환원시키는 게 가부장제다”, “다른 여성들을 등에 업고 말하지 말고, 당신은 당신 자신만 대표하라”라고 대답하면 일반 대중 여성들에게는 무관심하고 자신의 입장만을 편협하게 고수하는 꼴페미가 된다.

아니면 ‘일부’ 남성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을 만큼의 섬세함과 사려 깊음, 가르치려들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다움을 수행할 것을 요구받는다. 건전한 논의나 논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여성주의에 한해서만큼은 그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여성성을 이용한 정치학을 얼마만큼 잘 수행하는가에 따라 판단되기 쉽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자의든 타의든 어떻게 하면 ‘유연한’ 방법론을 실행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붓는 자신을 혐오하는 건,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서 당연한 현상이다.

문제는 두 가지 모두 피곤하고, 결과는 큰 차이나 변화가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방법이, 어떤 여성주의자가 ‘누구에게’ 더 환영받을지는 <타잔>에 등장하는 제인에 대한 베일만큼 날카롭고 위트 넘치는 아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제인 그 자체는 어디를 가나 존재한다. 그녀는 밀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정치가 옆에도, 회장의 옆에도 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선 <완벽한> 여자이며, 모든 시대의 모든 남자들이 바라는 여자이다. 에드가 라이즈 버로우즈(※<타잔>의 작가)는 그 사실을 너무나 빨리 파악했다. 항상 자신을 기다려주고, 자신의 결점을 너그러운 미소로 넘겨주는 (사실 타잔은 결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자를 어떤 남자가 꿈꾸지 않겠는가? 남자에게 꾸준히 힘을 불어 넣어주며,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이해해주는 여자. 지적인 우월을 표내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남자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여자. 바깥 밀림에서, 내부 회의실에서 남자를 기다리면서 남자가 막중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여자. 악어와 경쟁자를 정의의 이름으로 속여 제거해주는 여자. 그녀가 바로 제인이며, 모든 남자들은 제인을 사랑한다.

‘제인 | 남성 허위의식의 빌미’(페트라 리츠키)에서,
『20세기 여인들 : 성상, 우상, 신화』중


참고로, 타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운동이기 때문에 자신들을 설득시켜보라고 말하는 남성들에게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그 ‘일부’ 남성들이 저지르는 각종 해악은 왜 이렇게도 다채롭고 상상 이상인지, 여성주의자들 역시 신처럼 도처에 가 있을 수가 없다. 지향은 좋은데 방법론을 잘 못 찾아 삽질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에만 맡겨두기 불안하지 않은지? ‘대다수’의 남성들이 그 ‘일부’ 남성들을 ‘유연하게’ 설득한다면 세상은 애저녁에 바뀌었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덧붙임

몽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