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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가로지른 연대의 희망, 다시 떠나야 할 길

희망의 버스, 기억해야 할 것들 ①

키보드에서 자꾸 우리들을 불러내는 건 누구야? 아, 얘네는 작년에 무지개버스를 꾸려서 희망의 버스에 함께 했던 활동가들이야.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가봐. 자기네들끼리 막 얘기하더니 결국 이렇게 글을 쓰네.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하나인 듯 여럿인 듯 글자로 차곡차곡 담으려나 봐.

나를 가로지른 희망의 버스

희망의 버스는 2011년을 기억할 때 잊을 수 없는, 아니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쉽게 잊히지 않을 사건 중 하나일 거야. 특히 무언가를 이룬 느낌,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뭔가 해냈다는 감격이 남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더욱 값진 기억일 듯해. 아마 희망의 버스를 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모두 제각각의 의미를 남겼겠지만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는 일도 필요할 것 같아.

나는 인권운동을 계속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 사건이었어. 여러 가지 이유로 조금 힘들게 시작한 한 해였는데 서로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옆에 이렇게 든든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큰 힘이 됐어. 단체 활동을 하다 보면 다들 너무 많은 일들을 맡게 되고, 대충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는 알게 되지만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 어느 순간 고립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돼. 다른 활동들에 마음이 가는 만큼 손발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도 늘 마음이 아팠고, 아주 가끔 기자회견 같은 자리에 나가면 잠시 함께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돌아오는 발걸음만 더 무거워지는 경우도 많았거든.

인권운동도 워낙 다양한 영역과 부문들로 채워져 있다 보니 서로 만나는 것도 쉽지 않았지. 늘 만나는 사람들이 만나고, 모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에서 희망의 버스는 다른 가능성을 엿보게 했어. 농성을 하면 늘 농성에 대한 이야기들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이제는 ‘다른’ 이야기들을 나누는 게 어색하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고민이 확장되는 걸 볼 수도 있었어. 나를 버리지 않고도 타인을 만날 수 있게 된 거야.

절실함과 공명

나는 지금도 내 생존과 운동 사이에서 매순간 갈등해. 그래서 많은 것들을 외면할 때가 있었어. 하지만 어떤 생명이, 어떤 존재가, 사회의 외면으로 나의 외면으로 고립되거나 죽어갈 때 그 부채의식은 엄청난 것 같아. 희망의 버스는 이런 나에게 “꼭 가야지”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것이었어. 그것은 운동적인 당위이기도 했지만, 이번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다면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부채의식 때문이기도 했어.

그렇게 희망의 버스를 타면서 무언가 준비하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고, 견고한 벽 앞에서 넘어설 수 없는 걸 확인하며 더 큰 절망감을 느끼게 되기도 했어. 그런데 그렇게 함께 있는 순간이,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다시 만들어내고 싶은 시간과 공간이기도 해. 2차 희망버스가 차벽에 막혀, 물대포와 최루액이 난무했던 첫날밤이 지나고, 뙤약볕에 앉아 우산을 양산 삼아 차벽 앞에 앉아 있던 그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있던 그 시간, 왜 우리는 그늘로 가지 않고 한여름 뜨거운 길거리에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왜 우리는 통했는지, 즐거우면서 또 슬펐는지, 그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

아마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모두의 간절함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거야. 열사의 죽음을 삶으로 껴안고 혼자 크레인에 올라간 그녀가 희망 버스를 엮어낸 끈이었지. 그리고 그녀는 희망의 버스 탑승객들을 향해 오히려 여유로운 웃음을 선물했어. 사람들이 도우러 갔다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온다는 말을 많이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그건 지금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도 했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요구하지 않았고, 잘 살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끔 하는 것, 그리고 그 답을 현실의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스스로 찾도록 한 것. 그래서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만나 공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그런데 만약 김진숙이라는 인물이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면 희망의 버스는 불가능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더 짚어봐야 할 것들이 있지. 나는 김진숙에게 수많은 친구들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짚어보고 싶어. 사실 훌륭한 운동가들이 지금도 여러 현장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어. 그런데 김진숙은 ‘어떤 노동자’를 넘어서 ‘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냈고, 그래서 그만큼 많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아.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싸우는 노동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는, 농담도 건네고, 군고구마가 먹고 싶다고 아쉬운 소리도 하는, 그냥 누구나의 옆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지. 집회에서 듣게 되는 정치발언이나 인터뷰 기사가 억압과 분노-투쟁의 결의 서사만을 담는다면 그렇게 환원되지 않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퍼져 나왔던 거지. 농성장을 찾아갈 때도, 누군가를 알게 되면 한 번 더 가게 되는, 그런 것처럼.

소셜 네트워크

그건 트위터와 관련해서도 짚어볼 만한 부분인 것 같아. 김진숙과 연결되었던 트위터는 여기저기로 뻗어나가는 소통의 그물망이 되어 크레인을 허공에 버려두지 않고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지. 고공농성은 쉽게 고립될 수 있는데 희망의 버스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어. 그런데 트위터라는 수단만을 보는 것으로는 부족해. 희망의 버스를 타고 갔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트위터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거든. 오히려 희망의 버스와 관련해 트위터가 드러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보는 게 필요할 듯해. 날라리 외부세력 중 한 명인 박성미 영화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어. “트위터에서 벌어졌던 모든 크고 작은 움직임들의 공통점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트위터는 하나의 생태계이므로 “자연스럽게 스스로 일어나도록 놓아두면 볕을 만난 듯 꽃을 활짝 피운다”, 그러나 “뜻대로 움직이려 하면 자멸한다”고 말이야. 이건 트위터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어떤 운동을 모색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닐까?

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이전에 ‘소셜 네트워크’이지 않을까? 저마다의 절실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뭐가 됐든 일단 크레인 앞으로 가보자고 출발한 게 희망의 버스였어. 게임으로 말하면, ‘클리어’할 수 있는 ‘미션’이 제시된 거지. 그렇게 한 번 하고 나니까 각자가 자신의 미션을 만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 싸움이 누군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싸움이 된 측면도 있어. 들려주는 얘기 듣고 하라는 일 하는 것과는 다르게, 자신이 만들어갈 이야기가 있었던 거야. 그런 움직임들이 엮어지면서 ‘소셜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거지. 서로 다른 자리에 있어도 함께 한다는 기운으로 즐거울 수 있는.

희망의 버스가 여느 집회들과 달리,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궁금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중요해. 하나의 요구를 내걸고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만난 사람들이 서로를 궁금해 하게 되고,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게 되었지. 돌아보면, 희망의 버스가 아니었다면 만나기 어려웠을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됐던 것 같아. 물론 한 두 번의 만남으로 견고한 관계가 만들어진 건 아냐. 어쩌면 그래서 더욱 희망의 버스가 만들어낸 소셜 네트워크가 더 출렁거리면서 파장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해. 희망의 버스가 당장 또 다른 성과를 가시화시키는 것보다, 긴 호흡으로 어디에선가 분출할 힘을 예비할 필요가 있는 것도 비슷한 이유겠지.

희망의 버스가 보여준 연대의 가능성

그런 점에서, 희망의 버스를 한국 사회의 흐름 안에서 길게 보는 것도 필요해. 2008년의 촛불이나, 2009년 용산참사는 이미 어떤 변화들을 예고하고 있었어. 물론 희망의 버스는 그것들의 연장이거나 결과로서 등장한 것은 아니지. 하지만 희망의 버스 탑승객들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건 아니라는 거야. 현대사회의 열쇠말로 흔히 제시되는 불안이나 유동성은 크게 흔들리며 터져 나올 계기들을 예비하고 있어. 촛불이나 용산참사 때 그랬던 것처럼 희망의 버스는 사람들의 어떤 마음을 끌어낸 거지. 촛불이 먹거리에 대한 개인적 불안에서 출발했다면, 2009년의 싸움이 힘 없는 자가 당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불안과 연민에서 출발했다면, 희망의 버스는 불안을 뛰어넘기 위한 연대의 욕구에 불을 붙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건으로 등장한 것 같아.

그래, 연대는 희망의 버스에서 중요한 열쇠말이야. 우리가 무지개버스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희망의 버스 안에서 연대의 기운이 사람들을 들뜨게 했고, 한국사회에도 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준 게 정말 큰 성과야. 그게 이어질 수 있었던 게 희망의 버스의 큰 장점 중의 하나였지. 사실 그동안 ‘연대’라는 건 무슨무슨 공대위나 무슨무슨 연대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고, 그런 조직은 대체로 몇몇 단체의 주도 아래 고착되기 쉬웠어. 그리고 단체 중심의 연대체는 자발적인 개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쉽게 열지 못했지. 희망의 버스는 처음부터 탑승객들이 만들어가는 버스라는 걸 강조하면서 모두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하도록 독려했어.

그리고 그 싸움이 힘겹기만 한 것이 아니라 즐거울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는 점도 중요하지. 긍정적 의미에서의 ‘놀이’가 가능했던 게 희망의 버스였어. 무대를 향해 모두가 줄지어 앉아 있는 것과는 다르게, 여기저기에서 놀이가 가능했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거나, 여러 가지 음식을 준비해서 나눠 먹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가능했던 거지. 연대의 이유가 제각각이듯이 연대의 방법도 제각각일 수 있었던 것이지. 한편으로는, 방법의 문제를 떠나 유쾌하고 발랄하게, 그래서 쿨하게 싸울 수 있었던 것도 큰 힘이었어. 이 싸움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우는 비장함이 아니라, 이 싸움이 마지막이더라도 싸우는 유쾌함, 그 지점이 이미 희망의 버스가 승리한 지점이었어.

희망의 버스가 다시 떠나야 할 길

그런데 희망의 버스가 연대의 기운을 북돋았다고만 하기에 망설여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 2011년 한해만 보더라도 연대를 기다리는 수많은 투쟁의 현장들이 있었는데 희망의 버스는 한 사업장으로 달려갔잖아.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희망의 버스는 곧 한진중공업으로 연결되면서 외롭게 묻히는 싸움들도 없지 않았어. 물론 희망의 버스가 이어지면서 다른 여러 투쟁의 현장들에 대한 관심들도 생겨났지만 가끔은 서운하기도 했지. 인권운동에서도 희망의 버스 시작할 때가 서울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서명 받기가 한창일 때라, 서울에서 발을 뗄 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잖아. 다행인 건, 그래도 희망의 버스가 한 사업장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여기저기로 번져 나가고 있다는 점이지.

서울 학생인권조례 차별금지 조항을 원안대로 통과시키기 위해 시작한 농성장도 또 다른 희망의 버스였다고 생각해.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정문 앞의 희망텐트촌도 그렇고. 희망의 버스는 이미 희망의 버스를 벗어나 연대의 기운을 뿜어내고 있어. 그래서 희망의 버스를 노동운동의 역사 안에서만 짚어보는 경향을 주의해야 할 것 같아.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가 워낙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의제다 보니 이 싸움이 노동운동의 관점에서만 평가되는 경향도 있는 것 같거든. 대중들이 노동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거나, 민주노총과 같은 기존의 상급 조직들이 반성해야 한다거나 하는 평가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이렇게 의미를 한 방향으로 규정해서는 안 돼. 오히려 희망의 버스가 보여준 연대의 가능성은 누구나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도 연대할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노동자’들이 대중을 만나게 되었다고 평가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어.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생계를 해결하지. 이런 구조 자체가 인간의 존엄을 언제라도 훼손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어쩌면 ‘대중’들은 누구보다도 노동의 문제를 체감하고 있어. 다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싸워야 할지 막막해서, 또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지키고 삶을 가꾸기 위한 나름의 전략들을 익혀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거지.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투쟁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지 못했던 건, 그들이 몰라서이거나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너무 잘 알고 공감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싸움을 일구기 위해 필요한 건, 지도나 지침이 아니라, 말 그대로 허심탄회하게 고민도 나누고 하소연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장소야.

이어져야 할 희망의 버스 ‘운동’

지금 중요한 건 희망의 버스 ‘운동’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야. 희망의 버스를 운동의 전범으로 쉽게 고정시켜버리지 않으면서도, 희망의 버스가 던진 질문들을 곰곰이 되새기며 저마다의 크레인을 만들어가는 게 필요해. 희망의 버스가 오가는 동안 ‘우리 모두 소금꽃’이라는 구호를 외치곤 했어.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소금꽃’을 기억하되, 그것이 전형적인 노동자의 모습만으로 그려지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어. 우리가 가꿔야 할 희망의 씨앗, 그것이 피워낼 꽃은 한 송이가 아닐 테니까. 이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계급’, 그리고 그/녀들의 ‘저항과 연대’에 모든 상상력을 열어놓고, 끝을 두려워하지 않는 싸움, 그것이 지금 시작되어야 할 싸움이 아닐까?
덧붙임

이 글은 2011년 희망의 버스와 함께 한 무지개버스를 준비했던 활동가들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글입니다. 재구성과 집필은 미류(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