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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공룡트림] 바보야, 문제는 자기 계발이 아니야 성장이야

최근 들어 “어린이를 위한”으로 시작되는 어린이 책들이 많아지고 있어. 서점에 가면 어린이 책 코너를 점령한 책들은 대부분 <어린이를 위한 마시멜로우>, <어린이를 위한 시크릿>, <어린이를 위한 배려>, <어린이를 위한 이기는 습관>, <어린이를 위한 긍정의 힘> 등등의 책들이야. 이른바 어린이용 자기계발서들이지.

어른들의 자기계발서 내용은 대부분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야’라고 외치고 있어. 그래서 너만 잘하면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식의 자기계발서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어린이들에겐 이런 자기계발서들이 무슨 말들을 해주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서 이번엔 몇 권의 자기계발서를 살펴보려고 해.

“어린이를 위한”?

첫 번째 책은 『어린이를 위한 공부 습관』(꿈꾸는 사람들)이야. 이 책의 주인공 태양이는 반에서 공부를 제일 못해. 반 친구들의 성적이 모두 올랐지만 혼자 성적이 떨어졌어.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무시당하던 태양이는 사소한 다툼 끝에 친구들과 시험 성적으로 내기를 하기로 해.

이 책은 태양이가 올바른 공부 방법을 배우면서 성적이 올라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그런데 이 책은 처음부터 큰 문제가 발견돼. 그것은 바로 여기 등장하는 초등학교 아이들과 선생님은 전부 비현실적이라는 점이야. 시험 성적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고 어느 반이 공부를 잘하는 지 반 평균이 매겨지고 반 평균이 떨어지는데 기여한 태양이는 선생님께 끌려가 벌도 서고 꾸중도 듣지. 이 모든 장면들이 초등학교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야. 왜냐고?

초등학교의 성적은 등수를 매길 수도 없고 반 평균을 따져서도 안 돼. 또 단순히 기말고사 중간고사만으로 학생들을 평가하지 않아. 물론 성적표에 나오는 평가 내용도 등수를 매기는 방식이 아니야. 그런데도 이 책에는 버젓이 이런 일들이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있어. 왜 그럴까? 몇 년 전에 우리 학교 앞에 있는 학원에서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우리학교 전교 1등이 자기네 학원에서 나왔다고 자랑하며 써 붙인 적이 있었어. 수행평가에 반영되지도 않는 성취도 평가를 잘 봤다고 전교 1등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사실 여러 가지 평가 중 성취도 평가를 한 번 잘 봤다고 그 친구가 가장 공부를 잘 한다고 믿는 선생님들은 아무도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도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시험이 끝날 때마다 누가 전교 1등인지 알아보려고 수군대곤 했어. 학원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로 전교 1등이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있지도 않는 등수를 가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한 거야.

이 책은 그 학원의 현수막처럼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가지는 불안감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어. 나는 몇 등일까? 혹시 공부를 못해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무시당하면 어쩌지? 혹시 나는 공부 방법을 몰라서 지금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아닐까? 이런 불안감들에 사로잡혀 있는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마치 해답을 알려주겠다는 거지. 그러니 이런 책이 안 팔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 책 어디에도 왜 공부해야 하는지 그리고 공부를 통해서 어떤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어. 그냥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고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대학을 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이기기 위해?

두 번째 책은 『어린이를 위한 이기는 습관』(꿈꾸는 사람들)이야. 이 책의 주인공은 나대로와 엄마랑이야. 초등학교 6학년, 같은 반 친구가 된 나대로와 엄마랑은 교내에서 소문난 라이벌이야. 교내 과학경시대회 출전을 두고 나대로와 엄마랑은 치열한 경쟁을 펼치지. 두 아이들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심은 깊어져 가고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아.

그런데 이 책에서는 나대로와 엄마랑을 경쟁시키고 있는 이 이상한 과학경시대회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혀 나오지 않아. 고가의 수입품을 사용하든 말든 상관없고 경쟁이 과열되는 상황에서도 단지 팀별로 싸우면 안 된다는 규정만 있는 과학경시대회라니! 대회의 규정 자체가 공정하지 않은데도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무도 하지 않아. 그러니 참가한 학생들은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이기기 위해 뭐든지 하고 나쁜 짓도 서슴지 않는 경쟁을 하게 되는 거지. 이게 정말 경쟁에 참여하는 아이들의 문제일까?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는 건 지금의 경쟁사회에선 어차피 경쟁 자체를 받아들여야 하고 경쟁은 선이기 때문에 경쟁을 만드는 세상에 불만 갖지 말고 그저 경쟁에 참여한 너희들만 올바르게 경쟁하면 된다는 식인거야. 그래서인지 이 이상한 경쟁을 만든 교장선생님은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바람직한 멘토처럼 그려져 있어.

어린이들이 굳이 이런 책을 따로 살 필요가 있을까? 텔레비전을 틀어도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볼 수 있어. 만화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이런 형식의 이야기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어른들의 공식

세 번째 책은 『자기주도 학습을 위한 어린이 정리정돈습관 』(꿈꾸는 사람들)이야. 이 책의 주인공 은호는 정리정돈을 못해 주위가 언제나 엉망진창이야. 학교에서는 겉모습이 깔끔하고 단정해 인기가 많은데, 친구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은호의 방, 책가방, 서랍 속은 난장판이지. 아무렇게나 던져 둔 숙제와 준비물을 찾느라, 은호는 실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다른 모든 이야기처럼 은호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고 정리를 잘하는 아이가 돼.


이 책은 나머지 두 권의 책보다는 학교생활이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하지만 이 책에서도 여전히 정리정돈의 이유는 공부를 잘하고 성공하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고 있어. 사실 학생들이 배우는 도덕책에도 언제나 등장하고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누누이 이야기하는 정리정돈에 대해서 굳이 책을 또 낼 필요가 있는지는 의심스러워.

그리고 이 책에서 나오는 대로 ‘정리정돈=최고의 공부법’ 또는 ‘정리정돈=성공’이라는 공식이 정말 모든 경우에서 들어맞는지는 의심스러워. 정말 훌륭한 위인들은 모두가 정리정돈을 잘했을까? 어쩌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바라는 생활태도들을 성공 또는 공부 비법과 연결시켜서 강요하기 위해 이런 책들을 만드는 건 아닐까?

실패해도 괜찮아

이렇게 세 가지 자기계발 책들을 각각 살펴보았지만 이 책들이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서는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는 점이야.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다양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하며 성장해.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는 과정은 성공의 연속이 아니라 실패와 시행착오의 연속이야. 수많은 실패 속에서 배우는 작은 성공들이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자신만의 삶을 만들기 시작하는 거라고.

그런데 자기계발 책에는 성공만 있지 실패는 없어.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 뭘 해야 하고 공부를 잘하기 위해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들지만 ‘실패해도 괜찮아’라고 말하지는 않아.

그 뿐만 아니야. 사람들의 성장의 속도는 다 똑같지 않아. 공부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처럼 눈에 금방 드러나고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기 위한 시간과 다른 사람의 삶을 살펴보는 여유로움도 필요해.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에게 꼭 성공하고 경쟁에서 이겨야 된다고 가르치는 책들이 한가득 자리 잡은 지금의 서점 풍경은 결코 즐겁지 않아. 조금 느려도 실패를 계속해도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조금씩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을 응원해주는 어린이 책은 없는 걸까?

덧붙임

이기규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