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운동사랑방 후원하기

인권오름 > 어린이책 공룡트림

[어린이책 공룡트림] 스티커 낙인을 벗겨라

『나쁜 어린이표』와 『최기봉을 찾아라』

주로, 어린이에 대해 ‘크다’라는 표현보다, ‘키우다’라는 사동사를 자주 쓴다. ‘키우다’라는 표현 속에는 스스로 크는 힘보다 누구에 의해 길러진다는 의미가 강조된다. 꽃을 키우고, 강아지를 키우는 것처럼 ‘어린이’를 키운다.

물론, 돌봄은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돌봄의 기준이 어린이 본인이 아니라 이 사회의 기준과 어른의 기준만을 따르게 되면 그것은 ‘돌봄’과는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예의가 바르고, 모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항상 잘 웃어야 하며, 공부까지 잘해야 하도록 아이를 ‘키워야’ 한다. 이런 정도라면 이는 돌보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가치대로 ‘만드는’ 것이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소통과 대화를 통해 커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가치와 질서대로 ‘키워진다.’

‘잘했어요’ 스티커

위의 기준은 어린이 본인에게서 나오는 가치가 아니다. 어른들이, 이 사회가 ‘옳다고’ 가정한 가치들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그 기준을 따르기가 무척 어렵다. 저 기준 이외에 복잡한 일들이 어린이 생활 속에서,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무시된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에 따라 어른들은 평가한다. 갈등과 고통 속에서 겪어내며 살아내야 할 삶으로 보지 않고, 터득해야 할 ‘목적’으로 그 기준들이 강요된다. 그리고 그 기준대로 자라게 만들기 위해 ‘잘했어요’ 스티커와 도장을 찍는다.

아동문학이 어린이들의 심리와 마음 깊이 다가가기를 시도하면서, 스티커 낙인이 어린이의 감정을 어떻게 뒤흔드는지 그려낸 작품이 있어 소개할까 한다. 황선미의 『나쁜 어린이표』(웅진주니어, 1999), 지금으로부터 약 10년 전에 발표된 작품이다. 또 다른 하나는 최근에 나온 것인데 김선정의 『최기봉을 찾아라』(푸른책들, 2011)다. 동일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좀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 비교해 보니 재미있는 지점들이 있다.

처음 『최기봉을 찾아라』의 제목만 보고는 “대체 기봉이가 뭘 했길래”, “기봉이는 엄청난 장난꾸리기일 거야”, “기봉이가 가출을 했나?” 하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웬걸. 기봉이는 어린이가 아니라 교사의 이름이었다. 최기봉 선생님. 대강의 줄거리를 보면 최기봉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도난당했고, 그것을 찾아나서는 스토리다. 이야기를 보자면, 제목이 “도장을 찾아라”라고 해도 될 법한 것인데 『최기봉을 찾아라』라고 했다. 제목이 꽤 대담하게 느껴졌다. ‘선생님’자를 빼고 최기봉을 부르는 그 쾌감! 교사와 어린이들이 엄청난 전면 승부를 펼치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높아졌다.

1999년 작 『나쁜 어린이표』 역시 교사와 어린이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나쁜 어린이, 착한 어린이 스티커를 주는 선생님과 그것을 부당하게 느끼는 어린이와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스티커 교육에 대해 최초로 비판적인 발언을 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과 톤이 『최기봉을 찾아라』와 많이 다르다. 10년이라는 시간 차이도 있지만,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해 보고자 하는 방식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다.

세 가지 비교 포인트

첫 번째 비교 포인트는 ‘시점’이다. 두 작품이 글을 이끌어 가는 ‘시점’이 다르다. 『나쁜 어린이표』는 주인공 아이의 심리 묘사를 중점으로 하고 있는 일인칭 시점이고, 『최기봉을 찾아라』는 등장인물의 심리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삼인칭 시점이다. 시점이 다르다는 것은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 시사하고자 하는 바가 많이 달라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일인칭 시점인 『나쁜 어린이표』는 갈등 해결에 관심을 두고 있기보다 주인공 아이의 무너져가는 심리 묘사에 더 치중하고 있다. 스티커 교육, 그것도 잘못한 행동에 대해 ‘나쁜 어린이 스티커’를 붙인다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것이고 아이의 감정을 뒤흔드는 것인가를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갈등,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목표였다. 그래서인지 갈등만 증폭될 뿐, 해결점을 찾아 볼 수 없다. 갈등을 폭발시킬 흥미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픈 생채기를 더 아프게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고 해야 할까. 그로부터 10년 뒤 등장한 『최기봉을 찾아라』는 『나쁜 어린이표』가 던진 질문을 이어 받아 어디 한번 새롭게 해결해 보자고 시도하고 있다. 『최기봉을 찾아라』는 삼인칭 시점을 통해 어린이와 교사의 입장을 두루 펼쳐 보여주어 해결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어린이’의 시점에서 불공평한 문제를 드러내 놓았고, 그 다음엔 ‘교사’의 시점에서 교사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책임을 지도록 이끌고 있다.

뭐 그렇다고 『나쁜 어린이표』가 해결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좀 소심했을 뿐. 그리하여 두 번째 비교 포인트는 ‘복수방법’에 대한 것이다. 소심 복수 vs 과감 복수. 『나쁜 어린이표』는 자기만의 수첩에 선생님에게 나쁜 선생님표를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선생님은 마지막에 가서야 우연히 수첩을 보고 참회하는데, 독자로서 만족스럽지 못한 해결이었다. 이런 질문만 남긴다. “그럼, ‘착한 어린이표’는 좋은거야?” 『최기봉을 찾아라』는 교사와 정면으로 대결한다. 학교 곳곳에 교사의 이름이 박힌 도장을 꾹꾹 눌러 찍고 다니지 않는가. 도장을 훔쳐간 범인을 찾는 것만큼, 어디에 도장이 찍혔나를 찾아보는 것도 재밌다. 기쁜 해방감을 느낀다.

세 번째 비교 포인트는 교사가 이야기의 어느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느냐 하는 점이다. 두 책 모두 스티커를 부여하는 주체가 ‘교사’인 만큼, 잘못된 행동임을 느껴야 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동일하다. 『나쁜 어린이표』에서는 마지막에 가서야 갑작스럽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 『최기봉을 찾아라』은 교사가 눈에 불을 켜고 도장을 훔쳐간 주인공을 찾는 과정이 교사가 스스로의 문제를 자각하는 과정과 동일하게 진행된다. 어린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교사가, 이야기가 펼쳐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고 어린이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다시 살핀다.

‘크는’ 어린이들의 이야기가 나오길

그래도, 따뜻한 결말은 식상하다. 실제로 있을 법한 이야기라 느껴지지 않는다.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 작위적이라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따뜻한 결말로 끌고 가려 했던 이유는 뭘까. 작가가 교사인 만큼, 변화의 힘을 교사 스스로에게서 찾아보고 싶었던 열망이 컸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교사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놓쳐버린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나쁜 어린이표』나 『최기봉을 찾아라』나 어린이들이 뒤에 숨어서 선생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풀어 보고자 했으나, 어린이 스스로 이야기 속을 뛰어 다니며 엉킨 상황을 풀어나갈 주체로 부각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키워지는 존재’라고 하는 명제에 있어서는 ‘스티커 낙인’ 교육이나, ‘스티커 낙인’을 비판하는 시각이나 동일한 지점에 서 있을지 모른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주체가 되어 발랄하고도 유쾌하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어린이 입장에서 말하고 표현하고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나와 주길 바란다.
덧붙임

이선주 님은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