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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의 인권이야기] ‘미친년’이 된다 한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기 위해서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김준규 검찰총장의 발언을 최근에 기사를 통해 보게 되었다. 경향신문(2011.5.25.)에서 본 문제의 발언은 이렇다. “여성 검사들이 (일을) 잘해주고 있지만 어려움과 애환이 많다. 최근 내부 조사를 해보니 남성들은 출세를 지향하지만, 여성들은 행복을 지향한다. 남자 검사는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하는데, 여자 검사는 애가 아프면 일 포기하고 간다.”

분노하기도 이전에 김준규 검찰총장의 발언에서 느껴지는 어떤 결연함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남자는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을 한다? 이 정도면 보고 있기 민망할 정도의 ‘자기애(自己愛)’다. 남성이 집안일을 ‘포기씩이나’ 한다는 언설은 전형적인 남성중심적 사회의 해석 방식이다. 게다가 남성의 집안일 포기와 여성의 직장일 포기를 마치 동등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여성들에게 이중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더 나쁘다.

가만히 있어도 ‘희생’, 고군분투해도 ‘이기적’

위 발언에서 느껴지는 남자 검사들의 ‘희생정신’ 아우라에 압도되어 순간 내가 ‘포기’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싶어 사전을 검색해 보았다. [포기 : (1)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2) 자기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림.]

가족, 서울시, 국가 모두의 행복 여부가 모두 여성의 성역할 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서울시의 출산.양육 지원 지하철 광고

▲ 가족, 서울시, 국가 모두의 행복 여부가 모두 여성의 성역할 수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서울시의 출산.양육 지원 지하철 광고

‘포기’라는 단어가 내가 배운 바대로 한국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면, 이 인터넷 사전의 의미가 잘못 입력된 것이 아니라면 김준규 검찰총장의 발언은 남자들이 자신의 아픈 아이를 돌볼까 하다가 그냥 내버려두고 계속 일만 했다는 사실 전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 세상에 패륜도 이런 패륜이 없는데, 이 정도면 남성들은 자신들을 ‘집단적 패륜남’으로 만들어버린 김준규 검찰총장을 규탄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남성에게 ‘집안일’은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포기하고 싶은, 의미있다고 인정받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집안일을 ‘포기’하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하던 일만 계속해도 대단한 희생을 감수하면서 사회적 책무를 다 한 사람으로 알아서 칭찬을 듣고 인정받는다.

여성의 정체성은 늘 가족 내에서의 성역할로만 환원되기 때문에 여성들은 늘 이중삼중의 요구에 둘러싸인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 ‘(가족도 안 돌보면서) 참 대단한 일 한다, 그죠~’라며 비아냥을 듣고, 가족을 돌보러 가면 직업의식도 없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여자’가 되거나 ‘조직생활은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만 추구하는 여자’가 된다.

최근 또 국악단 간부가 지난 해 공연을 앞둔 연습 과정에서 임신한 여성단원에게 “괜히 뽑았다”, “피임도 못하냐” 등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국악단 간부의 발언은 사실 김준규 검찰총장의 발언과 궤를 같이 한다. 사회적 주체에 따라 같은 행위에 대해 다르게 해석하고 명명하는 것, 질적으로 다른 행위에 대해 동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 그래서 여성들에게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미션 임파서블을 요구하는 것, 모두 남성중심 사회의 유지전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더블 바인드(Double Bind)라는 말이 있다. ‘이중 구속’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어떤 사람에게 모순되는 메시지가 동시에 전달될 때 놓이게 되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한다고 한다. 단 두 개의 (하지만 실제로는 모두 달성 불가능한) 선택지만 주어진 상태에서 응답할 수도, 응답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공황상태. 이런 상태에서 사람이라면 당연히 ‘미친년 널뛰기’를 한다.

‘미친 여자가 재미도 모르고 널을 뛴다는 뜻으로, 멋도 모르고 미친 듯이 행동하는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미친년 널뛰듯’이라는 말을 검색하니 이런 사전적 의미가 나온다. 그런데 미친‘년들’도 아니고 왜 미친‘년’일까? 널뛰기는 두 명이 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재미있는 놀이인데, 혼자서 널을 뛰고 있으니 미쳤다고 하는 것일까. 널은 두 명이 뛰어야 하는데 미친년‘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 속담의 어원이 ‘미친년 날뛰다’에서 온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여자가 혼자 미쳐서 날뛰는 게 아니라, 미친 여자가 혼자서 널을 뛰는 게 아니라, 널을 혼자만 뛰라고 하니까 여자들이 미치는 거다.

[그림: 윤필]

▲ [그림: 윤필]


얼마 전 통계청이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전수집계 결과를 발표했는데, 현재 30대 전체를 10명으로 본다면 그 중 3명이 미혼이라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나에게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이 수치가 대단히 의미심장하게 읽히는지, 한 방송사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인터뷰를 했는데, ‘30대, 3명 중 1명이 미혼’이라는 기사는 ‘9명 가운데 1명 노인… 고령화 사회 진입’이라는 취재 뒤에 붙어 나가게 되면서 “이런 고령화 추세의 한 원인이겠죠?”로 설명되었다. 누군가에게 이 수치는 체제전복적이기 때문에 위협이지만, 누군가에게 이 수치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이 두려움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지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미혼인 사람들이 증가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실제로 미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남성중심적 사회의 이중 구속 하에서 미쳐버리기 직전의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이중 구속을 가능하게 한 권력에 저항하다가 미친년으로 찍혀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여자들, 혹은 사회의 미친년이라는 낙인이 주눅 들어야 할 경고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칭찬’으로 의미화 하는 여자들, 이미 그려진 지도 위에서가 아니라 ‘지도 밖으로 행군’할 수 있다면, 그 지도 밖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미친년이 되겠다는 여자들, 그리고 그 외에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덧붙임

몽 님은 언니네트워크(www.unninetwork.net) 활동가입니다.
* 이 글은 여성주의 커뮤니티 사이트 ‘언니네’(http://www.unninet.net/)의 채널[넷]에 동시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