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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 당신과 내가 믿는 것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었다. 만세!! 라기 보다는, 새천년을 맞이했다거나 새해가 밝았다는, 몸으로는 느껴지지 않지만 뭔가가 바뀌었다는 느낌처럼 멍하게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는 만들어졌다. 서울에서도, 다른 지역에서도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져야한다, 혹은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들로 온갖 매체가 들썩거렸다. 서울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서울본부가 만들어지고 주민발의라는 방식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하려고 한다. 주민발의? 만 19세 이상 서울 지역 주민의 1%가 서명을 하고 그걸 시의회에 제출하면……? 참 어렵다. 게다가 서울 주민 수의 1%는 약 8만 2000명, 정말 많기도 하다. 하지만 시의회나 교육청에서 조례안이 만들어지면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잘려나간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질 테니, 그것 보다는 우리가 고생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하게도 청소년인 나는 서명을 받을 자격이 되는 수임인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거리에서 서명을 받을 때는 언제나 수임인의 보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청소년은 서명을 해도 효력이 없다니, 참 화나는 일이다. 당사자는 쏙 빼놓고 법을 만들어야 하는 이 상황 속에서도 어쨌든 모든 것은 계속 진행 중이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10월 말에 시작한 서명운동은 그렇게 잘 진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2월 초순부터는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일주일에 하루 정도의 휴일을 제외하고는 아침 11시부터 저녁 5시까지 거리에서 서명을 받는 살인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거리서명, 고도의 심리 기술 마스터하기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30초만 서명해 주세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차별과 폭력이 사라질 수 있도록, 잠시만 시간 내셔서 서명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건, 교사도, 학부모도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19살 청소년인 나는, 입춘이 한참 지났는데도 멈출 생각을 않는 칼바람을 맞으며 3시간째 이 멘트를 되풀이 하고 있다. 학부모나 아주머니들은 ‘우리 아이들’이란 말을 좋아한다. ‘차별’이란 말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두발복장자유’라는 말은 엄두도 못 내고, ‘체벌금지’라는 말은 ‘폭력을 없애자’는 말로 대신한다. 그러면 실제로 ‘학교폭력’이라고 흔히 불리는, 학생 간 폭력 방지하자는 얘기인줄 알고 서명하기도 한다. 속으로 ‘뭐, 포함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하고 생각하며 웃음이 나오지만, 웃기는 너무 우울한 현실이다.

주민발의 서명에는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해야 한다. 이것도 사람들이 서명을 하기 꺼려하는 이유 중 하나다.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는 칸에서 멈칫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지방자치법에 의거한 거고, 서울 주민이신지 확인하는 데만 쓰이고, 데이터를 남기는 게 아니라 종이 째로 시의회에 전달되고 등등 구구절절 절대로 유출되지 않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는 정신 바짝 차리고 절대로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 신빙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방자치법에서는 주민발의를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어떤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받고 있는 서명에 주민등록번호를 흔쾌히 써 줄까? 서명 검토는 이름과 주소만으로 가능하다. 물론 주민등록번호가 있으면 더 편하겠지만, 결국 공무원들 편하라고 우리는 고생고생하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고 있다.

거리에서 ‘학생인권’이 거절당하는 이유들

여기까지는 모두 전단을 보고 한 번이라도 멈춰 선 사람들의 경우이고, 너무나 감사하게도 서명을 하기 위해 펜을 들어주셨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저기에 설명되지 않은, 학생인권 조례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찾아 읽어보고, 공감해서 선뜻 서명을 해 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겠다며 서명용지를 받아간, 그야말로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은 아름다운 사람들도 몇 안 되지만 있었다.

서명을 해 주신 분들의 몇 십 배나 되는 사람들이 우리를 원천무시하거나, 투명인간취급하거나, 가끔 어떤 분들은 “애들은 맞아야 돼.”라는 어이없는 멘트의 설교를 한다. 지금 바빠요, 시간 없어요, 라며 지나가는 사람들, 원망하면 안 되는 건 안다. 그 사람들은 지금 1분의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거니까. ‘괜찮아요’라면서 전단지를 거절하고 말을 자르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울고 싶어진다. 저는 안 괜찮아요. 고등학교를 그만 두기 전, 한자교사가 솥뚜껑만한 손바닥으로 애들 등짝을 패면서 “등이 성감대거든, 다른 데 때려줄게.”라고 말했을 때의 모욕감과 분노를 잊을 수가 없어서 안 ㅤㄱㅙㄶ찮아요. 하지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학교’는 드디어 출소한 감옥이고, 다시는 꾸지 않을 악몽이기 때문에 다시 그 실태를 듣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지금의 학교는 그렇게 사람들이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 안에서는 자신의 불행을 표현할 수조차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명!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 정말 냉정하게 판단해서, 망해간다. 서명 숫자는 결과를 예측하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운동에 자신을 내던지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내 안을 들여다 보면서 나오는 결론은 ‘망하게 할 수는 없다’이다. 나는 아직 거리에서 눈길을 주는 사람들을 믿고, 펜을 드는 사람들의 손을 믿으며, 신문의 작은 기사 한 줄, 짧은 뉴스 보도 한 장면에서 걱정하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을 믿는다. 그리고 조금 더 바라도 된다면, 그 사람들이 주변 한 사람에게 더 말을 하고, 우리에게 서명을 보내오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그리고 지금 해야 할 한 마디는 간결하고 명확하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위한 여러분들의 서명을 기다립니다.”

덧붙임

둠코 님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