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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영화제 15주년 기획 : 다른 생각에 대한 기억] 어쩌면 너무 솔직한 고백

2008년 오월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인권영화제를 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인권영화제는 2008년 이전 몇 년 동안,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운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와 지금은 사라진, 전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등에서 치러졌다. 극장 상영을 거부한 채 그야말로 거리로 나오겠다는 결의는 영화진흥위원회가 기본적으로 극장에서 열리는 영화제 상영작들을 대상으로 사전 심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이 또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정책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당시에 영화제 상영작들의 사전 심의를 문제로 여기는 주체도, 관련되어 특별히 부각되는 이슈도 없었다. 그저 덮어두면 극장에서 영화제를 열 수 있었지만 인권영화제는 다시 싸우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일순간 '인권영화제답다'는 생각이 스쳤다.

2000년 가을, 자원 활동가를 하고자 인권영화제를 처음으로 찾았다. 개막작이었던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를 이화여자대학교 운동장에서 상영할 당시 인산인해를 이루던 풍경이 아물거린다. 캠퍼스의 기운은 자못 풋풋함을 선사하지만, 교문을 통과해 묻고 물어 다다르는 대학의 강의실 역시 누군가에게는 턱이 될 수도 있다.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 제5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90년대 다큐멘터리에 한 획을 그은 스위스 다큐멘터리 작가 리차드 딘도가 「볼리비아 일기」를 토대로 96년 완성한 작품이다.<br />

▲ <체 게바라 볼리비아 일기> 제5회 인권영화제 상영작. 90년대 다큐멘터리에 한 획을 그은 스위스 다큐멘터리 작가 리차드 딘도가 「볼리비아 일기」를 토대로 96년 완성한 작품이다.



2001년부터 인권영화제는 봄으로 시기를 옮겼고 아트큐브에서 열렸다. 상영관의 좌석 수는 적었지만, 영사 시설과 음향 장비가 갖추어진 극장에서 오롯이 느꼈던 묘한 흡족함을 기억한다. 2002년부터는 아트선재센터와 아트큐브, 안정적인 두 극장에서 영화제를 준비했다.

2004년 제8회 인권영화제를 치를 때의 일이다. 아트큐브는 흥국생명의 본사 건물에 자리했고 이의 지원을 받는다. 수십억 대의 손해배상 가압류 신청, 블랙리스트 작성 등 당시 흥국생명의 노동자 탄압은 위력을 떨쳤다. 돌아보면 유난히 고급스러웠던 아트큐브의 화장실에서 청소 아주머니들은, 누구 한 명이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면 바로 걸레로 물기를 말끔하게 닦았다. 아마 지금도 여전할 거다. 인권영화제는 흥국생명 노동자들과 연대하고자, 아트큐브에서의 상영 거부를 결심하고 흥국생명 노동탄압의 실체를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상영했다. 상영관은 당시 서울아트시네마가 운영하던 아트선재센터 단관으로 축소되어, 상영작 편수 감소가 불가피했다.

제8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제8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장애인 접근권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제8회 인권영화제 때 시작되었다. 어느 저시력 장애인의 문제제기가 출발점이었다. 회의를 통해 인권영화제에서 장애인 접근권을 확보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고 결론이 났다. 결과적으로 지체 장애인을 위한 경사대 설치, 시각 장애인용 음성 해설이 곁들인 상영본과 점자 리플렛 제작, 청각 장애인을 위한 한글 자막 삽입 및 감독과의 대화 시 수화 통역 등이 실시되었다.

고백하건대 당시 영화제 준비를 앞둔 실무자로서 장애인 접근권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의의에는 머리를 끄덕이며 동의하면서도, 실상 생소했던 갖가지 준비들이 업무에 대한 갑작스러운 부담감으로 다가와 조금 버거웠던 것 같다. "꼭 먼저 이렇게 해야 할까?" 이를테면 비슷한 푸념이 마음속에서 일었다. 영화제 현장에서 애써 먼 길을 찾아온 장애인들을 만날 때 반가움과 미안함이 공존했던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아마도 몇 년 후, 여타 영화제들에서 장애인 접근권이란 말이 사용되는 걸 발견하고, -여전히 미약한 실정이겠지만-, 뒤늦게 마음이 젖었다.

인권영화제의 다음 행보는 예측 불가능하다. 도무지 어떤 저열함이 가능할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조차 힘든 현실에서, 보따리 장사마냥 가볍고 역동적인 몸짓이 계속되리라 믿는다.

덧붙임

이진영 님은 2001년부터 인권영화제 자원활동가를 거쳐 2005~6년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영화제 상임활동가로 일했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대학 영상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