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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비친 인권 풍경] ①“베트남 문화는 잊어버리고 한국 문화를 따라가게 돼요”

베트남에서 온 결혼이주여성 마이란 씨를 만나다

인천의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이주여성 마이란 씨와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그녀는 초행길인 나를 위해 직접 버스정류장으로 마중을 나왔다. 나는 내가 먼저 마이란 씨를 알아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어쩌면 나 역시 그녀가 이주여성이기에 ‘여느 한국인과 다르게 생겼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지나가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구분하지 못했다. 명색이 인권단체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인터뷰를 하러 가면서, 이주여성의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을 막연히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잠시 부끄러웠다.

우리 사회는 ‘다르다’는 사실을 곧바로 ‘차별’로 연결하는 데에 익숙한 사회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는 보노짓 후세인 씨 사건으로 한국 내 인종차별에 관한 논란이 불거졌다. 또 최근에는 강제 추방된 미누 씨 사건까지 더해지면서 그 논란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우리 안의 이방인’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성찰할 시간이 된 것 같다. 베트남에서 온 마이란 씨를 만나 한국에서 이주여성으로 살면서 느끼는 이모저모에 대해 들어 보았다.

마이란 씨와 딸 진희 양

▲ 마이란 씨와 딸 진희 양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나?

2004년 10월 22일에 처음 한국에 왔다.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결혼을 위해 이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 졸업 후, 집안에 여러 사정이 생기게 되었다. 어디로든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한국에 아는 언니를 통해 국제결혼을 생각하게 되었다. 언니는 1992년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왔다가 남편을 만나고, 베트남에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결혼한 경우였다. 언니의 결혼생활은 만족스러워 보였고, 언니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에 대해 갖고 있었던 생각은?

당시에 베트남에서는 한국영화가 유행이었다. 그래서 한국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처음 한국을 접했다. 또 한국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했던 사람들한테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옆집에 한 오빠가 3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약속을 잘 지킨다’ 등 좋은 이야기를 해 주어서 한국에 대해 괜찮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처음엔 너무 심심했다. 신랑은 일하느라 바쁘고, 하루 종일 혼자서 집에만 있다 보니 고향이 그립고 베트남 음식도 생각이 많이 났다. 돌아가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살다보니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가 참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시어머니께서 공항에 마중 나오셨다. 시아버지는 일하시느라 못 오셔서, 바로 시아버지께 인사하러 강원도로 갔다. 몇 시간 동안 비행기타고 오느라 너무 힘들었는데, ‘이게 한국 풍습이려니’하고 어쩔 수 없이 갔다. 베트남 전통의상 아오자이를 입고, 몇 시간동안 시아버지를 기다렸다. 너무 힘들었다. 또 명절 같은 때도 그렇다. 베트남에서는 설날 같은 명절 때, 당일에 시댁에 가지 않는다. 제사는 장남이 지내고, 동생들은 천천히 와도 된다. 그런데 한국은 다 전날에 와야 된다고 했다. 명절에 음식 하고 그런 것들도 너무 힘들다. 하지만 생각이 달라도 말을 잘 못하니까, 그냥 말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 문화는 잊어버리고 한국문화를 따라가고 있다.

가족이나 가족 외 한국 사람들의 시선에서 불편함을 느꼈던 적이 있나?

특별히 그랬던 기억은 없다. 하지만 가끔 한국어 때문에 불편할 때가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대화가 많이 통하지는 않았다. 발음이 많이 달라서 고생해서 항상 집에 있었다. 가끔 집 앞에 나갈 때, 옆집 할머니들이 나를 보고 누군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한국어가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굳이 말을 걸지 않는 느낌을 받았다. 시장 같은 데에 가서도, 더 얘기하려다가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얘기해도 소용없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번은 노동부에 볼 일이 있어 간 적이 있는데, 그 때도 내 한국어가 서툴러서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집에 가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한국어를 잘 못 알아들으면 그냥 무시하고 보내는 경우, 자신이 없어진다.

딸 진희를 키우면서 힘든 점은 없나?

아이는 엄마한테 말을 배우는데, 내 한국말이 자연스럽지 않아서 진희가 2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래서 한국어는 아주 능숙하다. 하지만 베트남어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몇 번 가르쳐 준 적이 있는데, 아이가 별로 관심이 없다. 일단은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한국어를 먼저 배운 후, 나중에 초등학생 정도 되면 베트남어를 가르쳐 주고 싶다. 하지만 가능할지 모르겠다. 서울에는 다문화가정을 위한 베트남어 교실도 있다고 하는데 인천에는 없다. 생겼으면 좋겠다.

2008년 제정된 다문화가족지원법에 따라 한국어 교육 지원 등의 각종 복지 지원책이 마련되었는데, 실제로 도움이 되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어 교육 지원을 받으려고 신청했는데, 거부당했다. 한국어를 잘 해서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한국어를 100퍼센트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지금 한국어 교육 지원은 갓 한국에 온 이주여성에 한정되어 있다. 배우고 싶은 사람은 누구라도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현재 한국어 교실은 초, 중급까지 밖에 없는데, 고급 한국어 강의 지원도 필요하다. 그리고 아기 낳았을 때, 산후 도우미 지원도 못 받았다. 정부가 도움을 주는 건 하나도 없다.

다문화 가정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책이 있나?

우선, 이주여성을 위한 취업지원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주변에 베트남에서 온 이주여성들은 모두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남편한테 생활비를 달라고 하기보다, 스스로 돈을 벌어서 생활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다. 일 할 수 있는 곳은 공장뿐인데,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아기를 돌보면서 일하기가 쉽지 않다. 일하는 시간이 길지 않고 아이들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두 번째로, 다문화 가정 소식지 같은 것이 발행되었으면 좋겠다. 이곳 외국인노동자센터를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아직 한국어가 서툰 이주여성들이 직접 이런 저런 정보를 알아보는 것은 힘들다. 동사무소에 다문화지원 담당부서가 있긴 한데, 다문화 가정 관련 설문지를 돌리러 온 것이 전부다. 아무런 도움을 준 적이 없다. 아이들 교육비를 지원해주는 제도도 있는데, 그것도 학습지 선생님이 알려줘서 나중에서야 알았다. 동사무소에서 그런 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속상해서 남편한테 얘기해도, 남편도 일하느라 정신없어서 몰랐다고 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

대학에 진학하고 싶다. 다문화 가정, 한국과 베트남, 이주여성과 관련한 분야를 공부하고 싶다. 그래서 나중에는 한국과 베트남을 연결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그 전에 한국어부터 완벽하게 공부해야 한다. 얼마 전에 한국어 시험을 봤는데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중급 4급 해보고, 5급, 6급에도 도전할 것이다.

그 밖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 이주여성이 많이 늘었는데, 그에 따른 지원은 부족한 것 같다. 빈곤층 다문화가정에 많은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이 많아져야 한다. 그래야 고향에 대한 향수도 잊을 수 있고, 이혼율도 낮아질 것이다. 가끔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그런 지원이 뒷받침되어야만 이주여성들이 ‘진짜 한국 사람’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진짜 한국 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녀에게 진짜 한국 사람으로 산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난 5년간의 한국 생활이 그녀에게 ‘진짜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한 과정으로 여겨졌다면,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의 정의부터 다시 내려야 하지 않을까. 한국 사회는 이주민들에게 ‘진짜 한국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대신 ‘당신과 우리의 문화가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자’고 손을 내밀어야 하지 않을까. 그때서야 비로소 ‘다문화 사회’라는 이름을 조심스럽게나마 꺼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덧붙임

융인 님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