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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석호필 덕분에

[이반의 세상, 세상의 이반] 떨리는 마음 : 커밍아웃하기

“석호필이 동성연애자구나. 몰랐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그녀가 무심결에 말을 내뱉었다. 석호필은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이름인 마이클 스코필드를 한국식으로 바꾼 애칭이다. 잠시 한가한 틈을 타 인터넷 기사들을 검색하던 그녀가 깜짝 놀라 말을 꺼낸 것이다.

순간 내 마음 속에는 회오리가 일었다. 아, 어떡하나. 저 낱말을 바로잡아주고 싶은데. 그런데 답답하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그저 가볍고 경쾌하게 지나가는 말처럼 지적할 수 있을까? 정색하고 얘기하면 나를 이상하게 보겠지? 내가 이 얘길 꺼내면 우리의 대화는 어디로 튈까? 차라리 커밍아웃을 할까? 그럴 것까진 없을까? 어떡하지?

귓전을 잡아끄는 ‘동성연애자’란 낱말, 그것이 그토록 갖은 질문들로 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만 머리털을 쥐어뜯었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와 ‘석호필’.

▲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와 ‘석호필’.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랍니다

한 십 초쯤 뜸을 들였을까, 용감하게 첫말을 떼었다. 한 낱말 한 낱말 발음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는 않은지, 좌불안석 신경 쓰면서.

“저기요, 동성연애자란 말은 안 쓰는 게 좋아요. 동성애자라고 하는 게 좋아요.”
“엥? 그거랑그거랑 뭐가 다른 거예요?”

잘 모르는 게 잘 아는 것보다 당연하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 동성애와 관련된 양질의 정보가 충분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질문에 숨이 턱 막혀 온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쉬운 질문이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 반응에도 나는 감사했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한 격렬한 반감은 없으리라 짐작할 수 있으니까. 여담이지만, ‘질문하기’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대화의 방식 중 하나다. 좋은 질문은 소통의 틈새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던진 질문에 최대한 사근사근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동성연애자라고 그러면 동성애자가 무슨, 항상 연애에 목매고 안달하는 것 같잖아요. ‘연애’ 하면 사람들은 ‘섹스’를 떠올리잖아요? 동성연애자라는 말에는 동성애자들이 섹스에만 정신팔고 사는 문란하고 불건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그대로 담겨있는 거죠. 이성교제는 이성교제고, 동성교제는 동성연애라는 거, 이거 좀 차별적이지 않나요?”

“아아, 난 또 그런 건 몰랐지. 그러니까 말하자면 동성연애자라는 말에는 동성애자는 나쁘다는 뜻이 들어있다 이거죠?”
“그렇죠, 그렇죠.”

워낙 성품이 따뜻한 그녀를 인간적으로 좋아해 왔는데, 낯선 이야기에도 스스럼없이 대꾸해 주니 한껏 고조됐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도 동성애자인걸요

우리는 석호필이 게이(남성동성애자)냐 아니냐 하는 애초의 화제로 돌아왔다. 그 역할을 하는 배우가 게이라는 건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돼버린지라, 나는 그가 동성애자란 얘기가 예전부터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으며 탄식했다.

“아니 우리는 어떡하라고 이렇게 잘 생긴 애들은 다 게이거나 여자가 있거나 그래?”

그녀의 얼굴에는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리’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레즈비언(여성동성애자)이니까. 커밍아웃을 해야 할 순간이었다. 대충 맞장구치면서 얼버무리고 말면 그만이기도 했지만, 그 날 그 순간 나의 내면은 신호를 보내왔다. ‘어서 똑바로 얘기해. 나는 그 󰡐우리󰡑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해.’ 용기를 내야 할 시점이었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래, 하는 거야.

“히히, ‘우리’라고 하면 안 되는데.”
“잉? 뭔 소리야?”

그녀는 뒤따라 나올 내 말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나도 석호필처럼 동성애자거든요.”

제발 분위기가 싸해지지 말기를 이름 모를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모든 신을 다 찾고 싶었다. 신이시여, 저는 그녀와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을 해야 합니다. 부디…!

다행히 얼른 살핀 그녀의 얼굴은 싸늘하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으로 두 뺨에 홍조가 떠올랐을 뿐. 이제 긴장은 완전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 그렇단 말이에요?”
“네, 그래요. 헤헤.”
“와, 나 태어나서 처음 봐.”
“많이 봤을 걸요,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그랬겠네. 말하기 쉬운 게 아니니까.”
“그렇죠, 뭐.”
“이야, 신기하다.”

기뻤다. 동성애자는 당신의 일상 속에 속속들이 존재한다는 걸 설명 없이 전할 수 있어서. 이게 바로 커밍아웃의 위력이다. 나는 이름 모를 신에게 감사드렸다. 또 한 번 무사히 커밍아웃을 치를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 늘 봐왔던 나를, 커밍아웃했다는 이유만으로 새삼 신기해하는 게 썩 기분 좋은 건 아니지만 이제부터는 점점 덜 신기해 할 테니 이 말은 그냥 지적하지 않고 패스.

일상에서 용기를 길어 올린다는 것은

동성애 관련 강의를 나가거나 인터뷰를 할 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강생이나 인터뷰어가 편견이 담긴 낱말을 쓰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차별적인 이야기를 쏟아 놓건, 나름대로 융통성 있게, 조리 있게, 사람 좋게 설명을 풀어낼 수 있었다. 활동가로서의 자의식 덕이다. 하지만 정작 내 일상에서 이런 상황을 맞부닥뜨리면 심장이 툭 떨어지는 것처럼 놀라고 허둥대기 일쑤였다.

레즈비언 후보라 밝히고 총선에 나섰던 최현숙 씨의 강연 모습.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강연과 일상은 또 다른 무게를 지닌 공간이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레즈비언 후보라 밝히고 총선에 나섰던 최현숙 씨의 강연 모습. 그러나 많은 이들에게 강연과 일상은 또 다른 무게를 지닌 공간이다. [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일상에서 동성애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얼굴 붉히고 흥분해서 어려운 말만 내뱉어 버리거나, 한없이 소심해져서 입 다물고 혼자 침울해지기도 했다. 내가 속한 공간에서 동성애 혐오 발언이 오갈 때도 파르르파르르 떨기만 할 뿐, 솜씨 좋게 대처하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다. 커밍아웃까지는 안하더라도 조목조목 또렷이 지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게 꽂힐 시선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더 이상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며 마음의 준비를 조금씩 해두었는데 이번에 조금 빛을 본 것 같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지만, 긴장의 밀도가 높았는지, 퇴근을 하고 나니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근무 시간 끝나기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라 천만 다행이었다. 아마 그 대화를 하고 하루 종일 그녀와 같이 있어야 했다면, 나는 적극적으로 이야기 꺼내길 더욱 주저했을 것이다. 뭐 별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긴장해야 하나 싶어 지치기도 했지만, 마구 ‘썰’을 풀기보다, 웃는 얼굴로 침착하게 잘 말했다는 데서 내가 더욱 용감해졌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나름 뿌듯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 뒤로도 그녀는 예전과 변함없이 나를 대한다. ‘비밀’이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 해 두었는데, 지켜 주길 기대해 본다.

그나저나, 활동가로 살아가면서, 자발적으로, 혹은 불가피하게 커밍아웃 해 볼 경험이 많은 나도 일상 속에서는 이렇게 힘들어하곤 하는데, 이반 친구 한 명 없이 고립돼 있는 레즈비언들은 오죽할까. 이 글에 적은 사례 같은 커밍아웃 에피소드는 무척 성공적인 사례에 속한다. 지극히 운 좋은 경우라는 거다. 여느 직장이라면 커밍아웃은 꿈도 못 꿀 일.

휴. 커밍아웃의 요령을, 커밍아웃을 감행하는데 필요한 용기를 더 많은 레즈비언들과, 성소수자들과 나누면 좋겠다. 나 혼자만 이상한 건 아닐까, 하고 겁먹은 채 두려워하고 있는 레즈비언들이 있다면 언제든 이야기 나누고 싶고 응원하고 싶다. 서로의 존재가 자기 긍정의 토대, 커밍아웃의 근거가 되니까. 우리, 만나요! 함께 해요!

덧붙임

케이 님은 한국레즈비언상담소(http://lsangdam.org) 활동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