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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감수성, 누구의 평화인지 묻자

[발로 걷는 평화교육] 평화감수성에 딴지를 걸다

인권 교육에서 ‘인권감수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던 것처럼 평화운동에서도 평화교육의 틀 안에서 ‘평화감수성’에 대한 고민과 실천이 진행되고 있다. 주류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물론이고 인권, 평화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이 ‘낡은 이념의 틀’을 깨고 ‘감수성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소통’과 더불어 ‘감수성’이 어느새 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은 듯 낯설지가 않다.

평화교육에 있어서 ‘평화감수성’은 소통의 출발점이자 교육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이 되어있다. 흔히들 평화교육에서 강조하는 ‘감수성’은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경험했던 고통, 현재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연민하고 나의 고통처럼 느끼고 타인의 시선을 통해 문제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다.

전쟁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시간.

▲ 전쟁과 자신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시간.


하지만 어느새 ‘평화감수성’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출발점이기보다는 ‘평화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기 성찰의 화법으로 바뀌고 있다. ‘평화로운 사람’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규정되는지조차 모호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만드는 것보다 평화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에 동의하고 있다. 자신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에서 말하는 ‘평화’는 모두 공허하다는 것일까?

평화여성운동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 한 분은 “여성은 출산을 통해 ‘돌봄노동’을 경험하면서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평화’가 훈련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평화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들여진다는 것인데, 감수성 역시 마찬가지고 따라서 여성은 출산이라는 기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러한 평화적 감수성을 훈련받을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여성에게 강요되는 출산과 육아노동을 ‘돌봄’으로 미화하는 것이 못마땅한 나로서는 ‘돌봄노동’이 ‘평화감수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도대체 ‘평화 감수성’이란 무엇일까? 이미 아이들에게 강조되고 있는 ‘평화감수성’은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일까? 아니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어떤 것일까.

아이들의 ‘평화감수성’

평화감수성을 통해서 평화를 키우는 힘이 커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평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화교육에서는 아이들의 감성과 상상력을 ‘평화적’으로 자극하고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 교육과정에서는 ‘평화감수성 일깨우기’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분단 상황에서 평화롭게 살기 위한 실천방안’과 ‘나와 세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건강한 삶과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를 설명하고 있다.

결국 “나(개인)-사회(개인이 속한)-국가(한국)-세계”로 연결시키고 있다. 과연 아이들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평화감수성’을 일깨울 수 있을까? ‘평화감수성’이라는 것 역시 ‘국가’라는 경계, 내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가정, 그리고 ‘나’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물론 한 가지 사례를 통해 모든 ‘평화감수성’ 프로그램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니다. 평화교육과 평화운동 진영 안에서 수많은 고민들과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 6월 사이 ‘민들레’와 ‘성미산학교’에서 ‘평화수업’ 비슷한(?) 것을 진행했다. 몇몇 수업을 통해서는 아이들의 일상과 소위 ‘평화적 감수성’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평화를 깨는 위정자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는데 정작 각자가 일상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것들, 심지어 좋아하는 것들이 어떻게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군사주의와 학교’에 대한 수업을 통해 각자가 “전쟁에 나는 얼마만큼 기여할까?”라는 질문도 해보고 각자가 ‘전쟁 참여도’의 정도를 직접 표현해보기도 했다. 흔히들 아이들이 잘 모르거나 잘 못 느끼기 때문에 전쟁 게임에 중독되고 미국식 영웅영화에 열광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참여도 예시판.

▲ 전쟁참여도 예시판.


하지만 아이들은 정확하게 자신들의 일상이 어떻게 ‘전쟁’과 연결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아이들은 자신의 ‘전쟁참여도’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로 평가할 정도로 자신의 일상과 전쟁의 연관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저는 동물 죽이는 컴퓨터게임을 좋아하는데 이런 게임들이 사람들을 쉽게 죽이고 전쟁을 미화하니까 저의 전쟁기여도는 높아요.” 이 아이는 자신의 전쟁 기여도를 거의 90% 가까이 표시했다.

아이들은 전쟁을 미화하는 컴퓨터게임들이 얼마나 나쁜지와 실감나는 장면들이 왜 잘못됐는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헐리웃 영웅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또 그 속의 거짓말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그런 게임기에서 손을 뗄 수 없고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테러집단을 깨부수는 영웅영화에 환호하는 이유는 단지 ‘감수성’ 훈련이나 ‘평화’에 대한 열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아이들이 경험하도록 내몰리는 사회는 우열과 경쟁이 지배하는 곳이고 아이들 개인의 ‘평화’는 일상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이 과연 ‘평화감수성’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자신의 성찰과 타인의 고통의 연대로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지금 이곳의 아이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 그리고 그 고통은 아이들과 세계를 분절시킨다.

평화감수성이 나를 부를 때

‘평화감수성’은 단지 전쟁이나 평화와 관련된 단일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포괄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근본적인 이야기로도 들린다. 하지만 분명하게 동의되는 지점은 ‘평화를 만드는 힘’이라는 것이다. “운동은 감동을 주고 그래서 사람들의 감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평화감수성’이 평화운동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는 기대 역시 커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수성’이 평화에 대해 우리 자신이 느끼고 싶은 것,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만들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평화’를 이야기하는 다양한 표현들이 ‘평화감수성’을 대신하고 있다. 노래로, 시로, 그림으로, 그리고 몸짓으로 평화를 말하고 평화를 설득할 수는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내 안에 ‘비평화’를 자극하고 ‘평화롭게’ 채워줄 뿐 포연과 하루하루가 고통인 사람들의 삶에 ‘직접’ 연대하는 행동은 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평화교육에서의 ‘평화감수성’은 아이들이 발 딛고 있는 곳의 모순들과 ‘나’와 ‘세계’를 끊임없이 단절시키고 무관하게 보이도록 하는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한 따뜻한 ‘연민’의 감정에 머무를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의 ‘평화’냐는 것이다. ‘평화감수성’은 절대로 중립적일 수 없다. 분노의 욕지거리가 아이들의 ‘평화감수성’에 어긋난다고 말하기 전에 그 분노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그리고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이다. ‘평화감수성’이 나를 부를 때 나는 어쩌면 너무나 자주 욕지거리로 대답할 지도 모르겠다.

덧붙임

강똥 의영 님은 ‘경계를 넘어’(http://ifis.or.kr) 활동가입니다. 강아지똥을 줄여 ‘강똥’이라고 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