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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오늘은 3천 원 벌었어”

보문동 ‘박스할머니’ 이금순 씨

가파르고 좁은 시멘트 길이었다.

“매일 이 골목 오르내리려면 힘드시겠다.”
“하루하루 더 힘에 부쳐. 허리, 다리 어디 성한 데가 있으야 말이지. 아이고야~”

그 골목 모퉁이에 있는 할머니 집에 이르기까지 묵묵히 길만 오른 건 가쁘게 숨을 쉬는 할머니에게 말을 건네기 미안스럽기도 하고, 할머니만큼 내 숨결 역시 고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막 할머니 집 문을 열려는데 이웃 분이 할머니를 불렀다. 종이박스 모아놓았으니 가져가란다.

“나 불쌍하다고 다들 저렇기 박스 모았다가 내줘. 자석들도 찾아오들 않고 혼자 에로이 산다고.”

이금순 할머니의 집

▲ 이금순 할머니의 집



문을 열자 시멘트 맨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가스렌지 밑으로 세면도구가 난잡하게 놓여있는 걸 보니 부엌 겸 세면실이다. 그곳 한 귀퉁이엔 신문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저렇기 모아 팔믄 1킬로에 40원. 하루 죙일 모아도 5천 원이나 버나? 만 원은 꿈도 못 꿔. 오늘은 3천 원 벌었어. 츰엔 좀더 벌 것다고 미아동까지 간 적도 있고 그란디, 지금은 아무리 쥐어짜도 그럴 힘이 안 나.”

이렇게 해서 버는 할머니 월수입은 10만 원이 채 안 된다. 그 돈으로 도시가스비(겨울엔 5만 원 정도), 전기료(1만 원), 수도세(5천 원) 등을 내면 주머니가 휑해진다. 그나마 할머니가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적은 식비다. 이가 시원찮아 잘 먹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이 반찬도 더러 갖다주어서다.

박스 줍다 눈도 잃었지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마흔에 서울로 올라왔다. 어린 나이에 돈 벌러 서울로 떠난 자식들과 함께 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 바람은 바람으로만 그칠지 모르겠다. 오래전에 막내아들과 몇 달 살았을 뿐 여든네 살인 할머니는 지금도 혼자 사신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한 건 물론 자식들이 있어서다.

“산골서 산나물 폴아서 근근이 먹구살았는디 애들 가르칠 정신이 있었겄어. 아들 서이, 딸 둘 있는디 막내만 빼곤 다들 국민핵교 다니다 말거나 게우 졸업했지. 막내놈은 공사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허고, 둘째딸은 건물 청소하구 그라지. 큰년이 쪼그맣게라도 식당을 하고 있구. 이것들이 일을 하고 있어서 혼자 살아도 정부 뒷받침을 받을 수 읎다고 하드라구. 자식이 읎느니만 못한 거지 뭐.”

조금은 원망이 밴 목소리.

“저렇기 모아 팔믄 1킬로에 40원. 하루 죙일 모아도 5천 원이나 버나? 만 원은 꿈도 못 꿔.

▲ “저렇기 모아 팔믄 1킬로에 40원. 하루 죙일 모아도 5천 원이나 버나? 만 원은 꿈도 못 꿔."



박스를 모으다 할머니는 한쪽 눈을 잃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에 찔렸는지 기억나지 않는단다. 그냥 좀 쑤시다 말겠지 하고 내버려두었는데, 한 날은 오줌을 지릴 정도로 통증이 심해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갔다. 그때는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가 수급권자였다면 그리 허망하게 눈을 잃었을까 싶다.

40년 만의 첫 전셋집

단칸방이지만 할머니는 지금 전셋집에 산다. 서울 와서 40여 년간 공사장 일에, 식당 일, 건물 청소, 노점상 등을 하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처음 얻은 전셋집이다. 이전에는 보증금 없는 사글셋집을 전전했다.

“나 겉은 사람이 8백만 원 모으는 건 기적이여 기적. 이 집 들어올 때 솔직히 내 자신이 대견하기까지 했어. 천장서 비도 좀 새고, 화장실도 밖에 딸리 있어서 주인댁하고 함께 써야 허지만, 월세 안 내는 게 어디여. 월세 내 봐. 남는 게 읎어, 남는 게.”

그런데 이 기적이 오래 못 갈 성싶다. 보문동이 곧 헐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할머니는 아득하다. 임대아파트 입주 신청은 해놨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못 들어갈 것 같다. 4, 5천만 원 되는 전세금은 꿈도 못 꾸니 월세로 들어가야 하는데 보증금 1300만 원도, 매달 15만 원인 월세도 마련할 재간이 없다. 거기다 관리비도 내야 한다니 한숨만 더 깊어진다. 자식들에게 임대아파트를 물려주면 좋으련만, 천생 8백만 원으로 새 집을 구해야 할 판이다. 눈앞이 캄캄해질 만하다.

할머니를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올 때였다. 어두운 골목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누군가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 그 불빛에 또 다른 할머니가 보였다. 새벽 1시에 그 할머니는 어둠 속에서 박스를 접고 있었다. 빛을 잃은 이금순 할머니의 눈, 어쩌면 저 어둠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