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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영화를 만나다]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켄 로치 감독, 2006

(이 글은 영화 내용에 대한 정보가 있는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영화 포스터

▲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영화 포스터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젊은 의사 데이미언(킬리언 머피)은 런던에 있는 병원에 일자리를 얻지만, 런던으로 가기 전 기차역에서 벌어진 영국 군대의 비인간적인 횡포를 경험하고 아일랜드에 남아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이니)와 친구들이 있는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 독립운동 군사조직)에 들어간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다가 영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아일랜드의 일부 자치만 허용한다는 데 찬성한 형 테디와 충돌하며 영국에 충성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를 얻기 위한 또다른 ‘독립 전쟁’을 시작한다.

데이미언과 테디 형제는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맞선 아일랜드의 용감한 ‘독립군’이라 자부하지만, 쉽지 않은 지난한 과정 속에서 결국 서서히 육체와 정신이 죽어가는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형제는 자신들의 국가 ‘아일랜드’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고 어떤 것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에 일치하는 듯하다. 끔찍한 고문을 견딜 것,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일랜드를 배신하지 않을 것, 배신하거나 복종하지 않는 자는 처형할 것. 영국에 대항해 함께 투쟁했던 형제는 결국 자신들의 적이었던 영국에 대한, 또 ‘독립’운동 너머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의견 차이로 IRA 내부 분열과 더불어 서로 다른 양 측에 서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격돌하다,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에 이른다. 영화 속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것은 쉽지만, 그 후에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집단과 개인의 충돌

이 영화는 “피를 흘리지 않고는 구원도 없다”는 1916년 더블린에서의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떠올리게 한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런던행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는 데이미언. 그것이 모두를 위한 타당한 결정이고 온당한 태도라는 것이다. 동지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오던 동네 이웃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한 데이미언은 총살하기 전까지도 머뭇거리다가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중얼거린다. “조국이란 게 이렇게 할 가치가 있는 거겠지!” 또한 형 테디가 영국군에게 끌려가 기밀을 누설할 것을 강요받으며 끔직한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동안에도 데이미언과 그 동지들은 “비밀을 누설하지 말고 견디라”고 외친다. 끝까지 고통을 참으라고.

그들은 ‘정치공동체’의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건다.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하지만 ‘진정한’ 또는 ‘훌륭한’ 시민이란, 반드시 ‘정치공동체’라는 더 큰 조직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책무를 져야만 하는 걸까. 인간의 권리는 단순히 허용되는 것이 아니며,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인간은 자의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박탈당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항해 기꺼이 스스로 총을 든 이들의 용기에는 충분히 박수칠 만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한다는 듯한 미묘한 의무감의 강요에는 쉽게 동의하기 힘들었다. 어떠한 훌륭한 명분에 의해서건 간에 도대체 누가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요구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떠한 전쟁의 명분을 떠나서 결과적으로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데 더 주목한다. 인간은 그 자체로 목적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기에 전쟁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경우에라도 타자나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율적인 존재이며 자기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고유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독립전쟁, 여성은 어디에?

영화는 영국이 아일랜드 식민 통치 시기 동안 수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했음을 보여준다. 아니, 식민 통치 자체가 자결권을 침해한 인권침해다.

▲ 영화는 영국이 아일랜드 식민 통치 시기 동안 수많은 인권침해를 자행했음을 보여준다. 아니, 식민 통치 자체가 자결권을 침해한 인권침해다.

이 영화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를 통해 본다면, 아일랜드 독립전쟁의 과정에서 여성들은 단지 보조적인 역할만 하는 매우 제한적인 존재이다. 총을 들고 싸우고, 싸우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견디는 아일랜드 독립의 영웅들은 모두 남성들이다. 데이미언의 연인인 시네이드(올라 피츠 제럴드)는 데이미언보다 먼저 독립군에 가담했지만 공동체에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뿐, 그들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그나마 그녀의 보조적인 역할마저 갈수록 축소되고 만다. 여성들은 독립군의 목표에 비교적 적은 관심을 보이고 덜 참여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주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 싸움의 목표는 무엇인가 등과 같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토론에서 토론에 참여하고 결정하는 이들은 대부분 남성이다(으로 보여진다).

계급 갈등, 동지에서 적으로

함께 IRA에서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전쟁을 위해 싸우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서로 다른 정치적 의견’의 핵심에는 계급 문제가 있다. 주인공인 데이미언의 형 테디로 대표되는 IRA 주류 세력은 ‘현실주의’를 내세우며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기 보다 고액의 고리대금으로 부를 축적하는 지주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한다. 더 큰 ‘악’인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무기를 살 돈이 필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지주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또 그들은 영국과의 평화협정에 서명하며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포기(혹은 무기한 유예)’하고 영국 왕실에 ‘귀속’될 것을 맹세한다. 이것 역시 더 큰 전쟁을 통한 더 끔찍한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현실주의’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그들 역시 항상 민중의 편에 선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IRA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우던 70%의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싸움을 포기한다면 가난한 아일랜드 민중들의 삶은 하나도 변하는 게 없을 것”이라며 완전한 독립과 보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주장하며 또다시 총을 든다. 하지만 결과는 내전으로 치닫는다.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싸우지만 정작 가난한 민중들의 요구를 ‘이상주의’로 치부하며 자신들만이 더 많은 것을 고려하고 있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주장은 결국 좀더 힘 있는 특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그 특수이익에 도움이 되는 질서를 제시하고 정당화할 뿐이다. 더 강력한 하나의 집단이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설명하는 독백일 뿐이다. 마치 전쟁을 ‘불가피한 현실’이라고 말하는 미국의 ‘미친’ 소리처럼. 테디는 영국과 지주를 증오하지만 결국에는 서서히 그들을 닮아간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지는 단골 주제다.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은 정작 덜 가진 사람들의 형평성 요구에 대해 항상 ‘이상주의’라는 표를 붙인다. 비현실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말은 오히려 덜 가진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보편적인 말이 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서 진정으로 현실적인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상’을 포기한 진보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