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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빈곤철폐의 날에 쏘아올린 작은 공

빈곤당사자들, 서울역의 버려진 공간 점거

세계빈곤철폐의 날인 17일 오전, 노숙인과 노점상, 철거민 등 빈곤당사자들은 빈곤·인권운동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구 서울역사 옆 미군여행장병안내소(TMO)를 점거했다. 빈곤에 저항하는 직접행동의 하나로, 1999년부터 흉가처럼 버려진 공간에 들어간 이들은 “서울역은 노숙인의 생존과 맞물린 중요한 공간”임을 강조하며 “사용되지 않는 공간은 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숙인들이 공공역사의 ‘주민’일 수밖에 없는 이유

주거권이 보장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주거비부담을 줄이기 위해 찾아드는 저렴한 숙박시설은 대부분 공공역사 주위에 포진해있다. 대표적인 저렴숙박시설인 쪽방은 서울에 4000여 개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70%가 서울역, 영등포역, 용산역 등 주요역사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쪽방이나 고시원을 이용하기도 어려운 사람들은 역 인근의 만화방, 사우나, PC방을 향하게 되고 이 곳마저 이용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면 공공역사를 찾아들 수밖에 없다. 또한 역사 주변에는 최소한의 생계비라도 마련하기 위해 일용직 노동을 구할 수 있는 ‘인력소개소’가 모여있다. 불안정한 일자리나마 얻기 위해 노숙인들은 공공역사 주변을 맴돌게 된다.
이렇다보니 지난달 30일 발생한 방화셔터 압사사건과 같은 사망사건이 공공역사에서 발생하게 된다. 교통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공역사가 노숙인의 생존과 맞물린 공간이라는 노숙당사자들의 주장은 공간의 부수적 의미가 아니라 공간의 본질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서울역 인근의 만화방. 건설일용노동자, 노숙인 등이 일일 4,000원을 지불하며 생활한다.<출처;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 서울역 인근의 만화방. 건설일용노동자, 노숙인 등이 일일 4,000원을 지불하며 생활한다.<출처;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



‘공공의 안전’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

인권을 박탈당한 취약계층이 공공역사로 모여들 수밖에 없는 현실에 반해 공공역사의 운영과 관련된 정책에는 이들이 고려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사라져야 할 존재’로 다뤄지고 있다. 2005년 1월, 서울역 대합실에서 평소 간질환을 앓고 있던 한 노숙인이 쓰러졌다. 철도공사가 짐수레에 환자를 끌고 다니며 시간을 지체시키는 동안 그는 사망했고 이 광경을 목격한 노숙인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회는 “노숙인이 공공역사에서 시민들에게 위협을 주며 난동을 부렸다”고 질타할 뿐, 아무도 그들이 대합실의 ‘주민’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게다가 역사청소와 전염병예방이라는 명목 아래 노숙인을 추운 거리로 내모는 일이 지속되었다. 노숙인복지와인권을실천하는사람들(아래 노실사)은 “영등포역 노숙인복지예산의 70%가 노숙인지원이 아니라 노숙인단속반의 운영에 사용된다”며 무력 단속을 통한 격리 원칙이 여전히 노숙인 정책의 핵심기조임을 지적한다.

누구도 저 손수레 위의 짐짝이어서는 안된다. 노숙당사자들이 준비한 피켓.

▲ 누구도 저 손수레 위의 짐짝이어서는 안된다. 노숙당사자들이 준비한 피켓.



서울역 사망사건 당시 ‘공공의 안전’을 위해 시신을 빼돌리기 급급했던 한국의 경찰에 비해, 독일 경찰은 ‘공공의 안전’을 다르게 바라본다. 홈리스 상태는 독일 기본법(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중’(1조), ‘자기의 인격을 자유롭게 발전시킬 권리’, ‘생명으로서 권리 또는 신체에 해를 당하지 않을 권리’(2조)가 위협받는 상태이며 따라서 공공의 안전이 위험에 처한 상태다. 노숙인을 범죄용의자나 전염병전파자로 보면서 ‘시민’으로부터 격리시키려는 한국과 달리, 독일의 노숙인은 권리를 침해당하고 있는 시민으로서 국가의 지원을 받아야 할 사람이 된다.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역사의 지원기능

한편, 프랑스에서는 국철, 지역의 공공교통공사 등이 그 업무의 일환으로 노숙인 지원에 관여하게 되어있고 ‘국철연대위원회’를 조직해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활동을 벌여왔다. 1995년 조직된 리옹역의 연대위원회는 ‘여행자 SOS’를 설치했다. 이곳에서는 도시교통서비스 등의 정보제공, 주소·전화찾기나 식사제공 등의 단순원조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상황을 검토하고 욕구에 대응할 수 있는 서비스와 조직으로 연계하는 특별원조도 수행된다. 이를 위해 여행자SOS는 역 당국, 보건복지국, 대사관, 사회복지 및 숙박시설과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다. 리옹역의 직원들은, 일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행자, 노숙인, 이민자 등이 여행자SOS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물론 행정기관만이 지원활동을 담당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복지긴급서비스(SAMU-social)’는 대표적인 노숙인지원체계인데 인도적인 민간단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
미군여행장병안내소를 노숙인진료공간으로 제공하라는 요구는 이미 작년 8월,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철도공사는 문화재청과 국방부로 답변을 미뤘고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다. 행정기관의 지원활동은 전무하다시피 하고 민간의 활동은 발목잡히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미군여행장병안내소를 점거한 이들은 버려진 공간을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SOS센터로 만들라고 주장했다.<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 미군여행장병안내소를 점거한 이들은 버려진 공간을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SOS센터로 만들라고 주장했다.<출처; 민중언론 참세상>



공공역사는 노숙인뿐만 아니라 집을 떠나온 이들이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누구나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므로 취약계층에게 발생할 수 있는 위기 상황에 적절하게 개입·대처할 수 있는 기능은 부가적 기능이 아니라 공공역사 본연의 그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지원체계의 마련이 공공역사가 마땅히 지녀야 할 공공성을 확보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쟁취한다”

수년 동안 버려진 공간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빈곤당사자들은 직접행동에 나섰다. 노숙인을 비롯한 빈곤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동안 한국 사회는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이들을 시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이제 가난한 이들이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타자화를 거부하고 삶의, 공간의 주체로 나섰다. 그들은 공공역사가 지녀야 할 공공성을 되찾고 이 공간을 삶의 근거지로 삼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점유와 사용의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온몸으로 발언했다. 누구의 소유냐고 묻기 전에 누가 필요로 하느냐를 물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바로 인권의 씨앗이다.

미군여행장병안내소 안. 인권교육을 진행하며 빈곤당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는 구조가 무엇인지,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 미군여행장병안내소 안. 인권교육을 진행하며 빈곤당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는 구조가 무엇인지, 우리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더욱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연합은 이렇게 말한다. “굶주린 이들에게 무료로 음식 제공을 하는 것으로는 결코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쉼터에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는 주택난을 해결할 수 없다. ...자선은 결코 불평등을 없앨 수 없다....진정한 형제애란 문제의 뿌리인 불평등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책임감을 필요로 한다.” 빈곤당사자들의 문제제기에 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