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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김도현의 인권이야기] 어느 하급심 판결에 대한 유감

삼세판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람들은 1심판결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항소·상고를 거듭해 대법원까지 가보는 경향이 있다. 2003년 현재 1심법원 법관의 1인당 본안사건 부담건수는 1118건으로 놀랄만한 수준이지만, 대법원의 경우에는 무려 1484건을 넘어서는 경악스런 수치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소남발이 한국인들의 삼세판 문화로 인한 것일까?

필자는 6-7년전부터 리눅스 운영체제를 주로 사용해온 탓에 KLDP라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종종 들른다. 최근 여기 게시판에서는 생긴지 한달 남짓밖에 안된 글타래 하나가 방문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으며 이례적으로 현재 12쪽이 넘는 글타래 쪽수를 기록하고 있다. 9월 8일자로 서울중앙지법에서 내려진 형사판결을 둘러싼 토론, 'GPL 관련소송: E사 대 H사 사건'이 그것이다.

KLDP(kdlp.org) 초기화면

▲ KLDP(kdlp.org) 초기화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E사 직원으로서 E사의 전략 소프트웨어 Etund를 개발한 ㅎ씨가 지난해 말 E사를 퇴사하면서 Etund 코드를 신생 경쟁사인 H사에 유출하여 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에관한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법원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ㅎ씨에게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하였다. 여기까지는 누가 보아도 영업비밀침해죄를 면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런데 왜 KLDP를 발칵 뒤집은 사건이 되었을까? 문제는 Etund가 GPL(GNU General Public License)의 적용을 받는 프로그램인 Vtund를 개작한 소프트웨어라는 데 있다.

GPL은 저작권사용허락약정의 하나로서 이용자의 자유로운 사용·배포·개작을 허용하는 자유소프트웨어 라이선스다. 마이크로소프트의 EULA가 복제·배포·개작 따위를 금지하는 규정들로 점철되어 있다면 GPL은 이러한 행위를 허가하는 규정들로 이루어진다. 다만 개작한 프로그램을 배포할 때에는 GPL에 따라 전체 소스코드를 공개해야 한다는 약간의 제한이 따른다. 이는 자유소프트웨어로부터 이득을 취하면서도 이를 공공에 환원하지 않고 독점하려는 반도덕적 행태를 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한이다. 따라서 GPL 소프트웨어의 파생저작물인 Etund는 그 소스코드를 공개하지 않으면 저작권법 위반을 면할 수 없게 된다.

피고인 ㅎ씨는 Etund 코드는 공개대상이므로 이에 대해 영업비밀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항변했다. 사실 여타 범죄사실이 인정된다 해도 핵심에 해당하는 Etund 유출이 영업비밀침해가 아니라면 적어도 실형만은 면할 법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항변에 대한 구체적인 배척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실형을 선고했다. "Etund는 비록 공개된 소프트웨어인 Vtund를 기반으로 개발된 것이라 하더라도…비밀로 유지, 관리되고 있는 기술상의 정보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 아니한 것임이 분명하고, 영업비밀로 보호받을 독립된 경제적 가치 또한 충분히 인정된다 할 것이며…, 이른바 오픈소스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GPL 라이선스 규칙이 이 사건에 있어서 어떠한 법적 구속력이 있다 할 수 없으므로, 결국 피고인들의 주장은 이유 없다."

GPL 라이선스가 이 사건과 무관하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GPL 소프트웨어가 영업비밀로서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영업비밀로서의 법적인 가치까지 긍정할 수 있는가? 일반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아니한 사정이 불법의 결과라도 그러한 사정을 보호할 수 있는가? 대법원 판례 하나만을 무뚝뚝하게 인용하면서 재판부는 이들 쟁점에 대해 아무런 이유설시 없이 결론만 제시했을 뿐이다. 당연히 이에 설득될 수 없었던 피고는 판결문을 받아보자마자 항소하였다. KLDP에서는 이 판결의 의미를 둘러싸고 가정법에 기초한 갖가지 추측과 이론이 난무하였다.

사건의 신속한 처리도 중요하지만 설득력 있는 판결이야말로 사법의 관건이다. 세 축의 국가권력 중 유일하게 국민으로부터 직접 정당성을 얻지 못한 사법부가 기댈 것은 설득력 있는 논증뿐이다. 하급심 판결이 부실할수록 상급법원의 부담은 커지고, 그만큼 사건당사자의 고통도 배가된다. 법관수를 늘리고 충실한 심리를 보장하는 제도적 여건을 마련하며 하급심 재판을 강화하는 길이 사법에 있어 인권보장의 정도이다. 법관 1인당 연간 사건부담이 천 건을 훌쩍 넘는 상황에서 '국민을 위한 사법서비스'가 공염불에 그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덧붙임

김도현 님은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