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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 영화를 만나다]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공식적인'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는 4명의 어린이들이 전기도 물도 끊긴 채, 궁핍의 바닥에 허덕이며 어느 아파트 한 구석에서 살금살금 살아간다.

아무도 모른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작은 마루 바닥에, 닳아빠진 크레파스 조각이 뒹굴고 더러운 옷더미가 쌓여갈 때, 서로를 보듬으며 일상을 이어온 그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도 잦아든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사진 [출처] (주)동숭아트센터

▲ <아무도 모른다> 스틸사진 [출처] (주)동숭아트센터



아무도 모른다. 이웃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 좁은 아파트 베란다에 한 발을 내딛을 때조차 숨죽여야 하는 4남매에게, 공원 놀이터의 회전 기구는 더없이 찬란한 해방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아무도 모른다. 동생의 싸늘한 육신을 비행장 어딘가에 묻어 두고, 남은 어린이들은 편의점 뒷문을 통해 얻은 초밥을 먹고 공원의 수돗물을 마시며, 버려진 잡초를 가꾸며 여전히 숨쉰다.

<아무도 모른다> 스틸사진 [출처] (주)동숭아트센터

▲ <아무도 모른다> 스틸사진 [출처] (주)동숭아트센터



1988년 일본 전역을 들썩이게 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모태로 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2004)는 자족을 갈구하는 어머니가 떠나간 후, 별다른 정신적, 물리적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4계절을 맞이한 4남매의 고군분투기이다. 선정적으로 보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소년, 소녀 가정의 도식적인 스토리 라인을 따르지 않고, 절망의 끝자락에 놓인 듯한 4남매가 일구는 처절하면서도 싱그러운 생존의 몸부림을, 빛의 변주를 통하여 맑은 수채화 톤으로 담아낸 극영화이다. 등교는 고사하고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아 생길 수밖에 없는 교육받고자 하는 욕구와 또래 집단과의 단절감, '자식 딸린 미혼모'로서의 존재를 탈피하여 생의 전환을 꿈꾸는 어머니의 행위로 인한 소외감을 섬세한 디테일로 표현한 삶의 응시가 단연 돋보인다.

카메라는 어린 동생들을 양육하고,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어린이들의 주체적 행동을 감정적 개입을 절제하며 포착하면서, 소년, 소녀 가장을 단순히 불쌍한 존재로만 규정짓는 견고한 시각을 다소 벗어났다. 더불어 감독은 4남매를 방치한 현대 사회의 무관심을 절망이 뒤섞인 냉소로 바라보지 않는다. 소통 부재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히드라인 '왕따' 당한 학생과 남매는 손을 맞잡고 온기를 나눈다.

그렇지만 문제를 양산하는 뿌리의 진원지가 무엇인지 시사하지 못하고 4남매를 뒤로한 '철없고 무정한 어머니'와 어린이들을 방치한 사회전반의 무관심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시선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매끼리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싫어 복지기관에 가지 않는다" 는 한 마디 대사만이 그저 무정형의 부조리함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수동화 시키는 것을 뛰어넘으려는 성찰과 아울러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는 영역의 문제를 구조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려는 노력은 요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