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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의 눈으로 과학기술을 바라보자

과학기술과 인권 이야기 (3)

생명공학, 정보기술의 진전과 같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인권침해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나라 인권 운동 진영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과학기술과 인권을 고민하기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산적한 인권 문제들을 있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최근에 새롭게 제기 되고 있는 대부분의 인권적 쟁점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돼 있음을 고려해볼 때 정보인권의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는 관심이 너무 적다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운동의 우선순위 이외에 과학기술 문제에 대한 대응이 부족한 또 다른 이유는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는 과학기술에 대한 통념과 과학기술은 다른 영역과 다르다는 전문가주의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통념 깨야

일반적으로 과학기술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중성적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과학기술은 사회와 무관하게 발전하고, 그 발전방향은 우여곡절이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진보의 방향이며,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기 보다는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관점을 수용하게 되면 과학기술은 중립적이어서 활용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사회에 영향을 주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과학기술에 대한 신비화된 이미지는 우리가 현재 일상에서 접하는 과학기술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막연한 이미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개별적 과학들이 갖는 성격으로부터 추출해 낸 것이 아니라 18세기에 계몽철학자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규범적 허구에 불과하다. 또한 최근의 과학기술은 상업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고, 기술도입의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각종 수사(修辭)를 유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사회적 과정으로서의 과학기술

과학기술에 대한 과도한 믿음은 지난 수십년 동안의 경험과 많은 사례연구, 사회변화 속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군사적 목적으로 개발된 과학기술지식으로 인해 대량살상 무기가 만들어졌고 일부 과학이론은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데 쓰이고 있다. 기술발전 때문이 아닌 오히려 기술에 문제가 있더라도 감시와 통제력 증가를 위해 신기술이 작업장에 도입된 경우도 많았으며, 지적재산과 결합된 과학기술은 제3세계를 착취하는 도구나 사회적 약자의 접근권을 차단하는데 쓰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60년대 말부터 과학기술의 진보가 곧 인류의 진보라는 낙관적 견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의 다양한 폐해로 인해 환경운동, 페미니즘, 여성보건운동, 소비자운동, 반전평화 운동 등이 일어나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성찰적 분위기가 생겨났고 발전하면 좋은 것에서 적절한 통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70년대로 넘어오면서 부터는 과학기술의 내용이나 과학기술이 사회와 맺는 상호작용에 대한 학문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여러 형태의 연구 결과 과학기술의 성격을 이해하는 유력한 이론인 '사회적 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가 등장하게 되었다. 사회적 구성주의는 과학기술을 초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해관계, 가치, 역사, 문화, 제도 등에 영향을 받아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과학기술을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면 현재의 과학기술이 유일한 경로가 아니며 대안적 과학기술의 사회적 구성도 가능하다. 즉 개입과 참여를 통해 보다 인간적이고 친환경적인 과학기술의 구성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법, 정치, 언론 등에 대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기술 또한 개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기술관료주의의 극복

과학기술의 성격문제 뿐만 아니라 개입을 가로막는 또 다른 장애는 전문가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사회의 다른 영역과 달리 복잡성과 난해함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그 분야에 훈련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관점은 전문가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시민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성찰과 구성주의가 등장하고 전문 지식의 한계와 시민지식의 유용성이 밝혀지면서 참여를 막아왔던 논리들이 점차 완화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공공적 성격과 대부분의 연구비가 시민의 세금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참여의 권리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며,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정책결정의 정당성과 효과성이 중요하게 고려된다.

일반 시민들의 개입과 참여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킨 사례도 많다. 이미 서구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과학기술과 인권 쟁점에 대해 참여를 통한 공론화나 사회적 합의를 추구할 수 있는 모델들을 도입해 실시하고 있다. 이런 참여의 권리는 기술시민권(technological citizenship)로 요약될 수 있다. 기술시민권은 과학기술사회에서 정책결정과정과 관련해 사회구성원들이 향유해야 하는 권리를 말하는데 △지식 또는 정보에 대한 접근권 △정책결정에 참여의 권리 △의사결정을 합의에 의해 처리해야함을 주장할 권리 △집단이나 개인을 위험에 빠지게 할 가능성을 제한 할 권리 등을 포함하고 있다.

국내외 일부 인권연구자들은 향후 새롭게 제기될 인권적 쟁점들이 과학기술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나타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으로 어떤 인권침해가 일어날 것인가'를 고민하고 대응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과학기술은 특정한 '가치'를 배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파생되는 문제점을 모니터링하고 해결하는 사후적 처방에 그치지 말고 '인권의 가치가 과학기술의 진전 속도, 방향, 내용에 반영'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이런 개입을 위해서는 과학기술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버리고 다양한 맥락 속에서 과학기술과 인권의 의미를 바라봐야 한다.
덧붙임

김병수 님은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