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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이라크 파병에 맞선 '이등병', 다시 돌아오다

[인터뷰] 가석방 된 강철민 씨

지난 2003년 11월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며 기독교회관에서 7일간 농성했던 강철민 씨가 다시 돌아왔다. 강 씨는 지난해 3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지난달 28일 1년 3개월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당시 함께 농성했던 사람들이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던 4일 오후 기독교회관에서 그를 만났다.

가석방된 강철민 씨

▲ 가석방된 강철민 씨



- 석방된 소감은?

= 기쁘다. 앞으로 3개월 동안은 정기적으로 보호관찰소에 신변상황을 보고해야 하지만 몸은 일단 자유롭다. 가석방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는데 갑자기 결정됐다. 분위기에 잘 적응되지 않아 아직도 멍한 느낌이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을 것 같다.


- 농성 당시 함께했던 사람들과 다시 만난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 너무 반가웠지만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오전에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는 나동혁 씨를 면회하고 왔다. 그는 당시 농성을 적극 지원했었는데 내가 갇힌 후에도 곧잘 면회를 오곤 했다. 꼭 다시 만나자고 했는데, 내가 풀려난 지금 그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로 감옥에 갇혀 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군대, 국가가 '징집'으로 시민들을 협박하는 일이 과연 정상적인가? 어서 빨리 대체복무제도가 개선되고 나 씨가 풀려나길 바란다.


- 재판 과정에서 느낀 점은?

= 1심 재판부는 "당신은 물건을 빌리면 잘 갚느냐", "미국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미국에 종속된 심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판결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2심에서도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래도 판사는 "실정법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지만 파병을 반대하는 행동과 양심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를 처벌하든 말든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동참해서 받을 피해는 우리나라가 입게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했다.


- 당신이 갇혀 있던 2004년 2월 이라크 추가파병 동의안이 통과됐고, 6월에는 이라크 저항세력에 인질로 잡혀 있던 김선일 씨가 피살당했다. 당시 심경은?

=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너무 답답했다. 돌이켜보면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를 쓰고 농성에 돌입했던 당시 마음도 군복무를 하는 내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한 결과였다. 하지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파병에 반대하는 신문광고라도 내는 일이었다.


- 교도소에 갇혀 있었는데 가능했나?

= 안에서 뜻맞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았다. 2004년 2월 면회 온 친척에게 침략전쟁에 반대하고 파병에 반대하는 내용으로 <한겨레> 의견광고 신청을 부탁했다. 하지만 면회기록에 내가 한 말이 고스란히 남아 '부정모의'라는 이유로 1달간 '징벌방'에 갇혔다. 독방에 갇혀 면회나 운동도 금지 당해 혼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한 '부정'모의라는 것이 누구에게 '부정'한 것인지….


- 결국 한국군이 파병됐고 정부는 이들이 현지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 파병된 한국군은 재건을 목적으로 한다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파병과 무엇이 다른가? 단지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군사독재 시절이었다는 점일 뿐이다. 한미관계가 독립적이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자국의 국민들을 총알받이로 내몬 일이다. 침략군의 일원으로 이라크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네들의 삶의 터전에 총을 들고 자리를 잡은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 일단 입대 전 다니던 대구 가톨릭대로 복학할 작정이다. 그후 계획은 주위 분들과 함께 의논하고 싶다. 갇혀 있는 동안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농성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강철민 씨의 출소를 축하하며 4일 저녁 환영식을 열었다.

▲ 농성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강철민 씨의 출소를 축하하며 4일 저녁 환영식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