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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움틈> '자연의 권리'로부터 배운다

인간중심적 발전권 개념의 재구성을 위하여

최근 지율스님의 100일 간의 단식으로 극적 전환점을 맞은 천성산 살리기 운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새롭고도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인권운동도 그 화두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연의 권리' 주장. 도룡뇽을 원고로 내세운 '자연의 권리' 소송은 비록 패소했지만, 인간 중심의 환경권이나 발전권이 아닌 자연의 권리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도룡뇽 하나 살리자고 국책사업을 중단시키는 게 말이 됩니까?", "자연의 권리라니요? 인간이 우선 아닙니까?" 천성산 관통터널 공사 중단 결정이 내려지자 몇몇 시민들은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존엄에 종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자연의 존엄, 자연 자체의 권리 주체성을 주장하는 이 새로운 운동의 흐름을 인권운동은 과연 어떻게 받아 안아야 할 것인가.


'자연의 권리'의 도전

2003년 10월 15일 '도룡뇽'과 '도룡뇽의 친구'를 자처한 이들은 한국철도건설공단을 상대로 고속철도 터널 공사중지 가처분신청을 울산지법에 냈다. 당시 이들은 "자연은 인간의 생존과 존재의 기반이고, 인간의 편익에 봉사하거나 인간에 의하여 함부로 개척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고유의 가치를 가진다"며 자연물인 도룡뇽도 파괴로부터 보호받아 할 권리를 마땅히 가진다고 주장했다.

천성산과 뭇생명들을 대표하여 원고로 나선 꼬리치레도롱뇽 [출처] 도롱뇽소송시민행동

▲ 천성산과 뭇생명들을 대표하여 원고로 나선 꼬리치레도롱뇽 [출처] 도롱뇽소송시민행동



'자연의 권리'라는 주장이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미국 남캘리포니아 대학 법철학 교수인 크리스토퍼 스톤에 의해서였다. 최근 『법정에 선 나무들』이라는 제목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면서 이름이 더욱 알려진 스톤 교수는 1972년 <나무의 당사자 적격>이라는 논문을 통해 자연물에도 법적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가 침해될 경우 방해 배제, 원상회복, 손해 배상 등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국가나 법인, 학교 등 인간이 아닌 존재가 법인격을 갖듯이 자연물도 법인격을 가질 수 있으며, 이 권리는 자연의 권리를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시민(또는 단체)에 의해 대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상당한 논란과 통렬한 비판을 낳았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법정에 간 자연의 권리

스톤의 주장은 같은 해 월트 디즈니사가 미네랄킹 계곡에 스키리조트 등 대규모 위락시설을 건설하고자 했을 때 환경단체인 시에라클럽이 제기한 소송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소송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윌리아 O. 더글라스 대법관은 소수의견에서 "자연의 생태적 균형을 보호하고자 하는 현시대의 대중적인 관심은 자연물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당사자 자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이듬해인 1973년 미국은 '멸종위기 종 보호법'을 만들고 "시민은 누구라도 자연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소송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하와이 희귀조류 팔리아 사건(1979년), 북부 점박이올빼미 사건(1988년), 그래엄산 붉은 다람쥐 사건(1991년), 플로리다 사슴 사건(1994년) 등에서도 미 법원은 원고 적격 판정을 내렸다. 자연물을 권리 당사자로 인정한 셈이다.

반면 일본과 독일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는 소송이 줄을 이었지만, 대부분 원고 부적격 판정이 내려졌다. 일본의 '우는 토끼' 소송만이 소중한 결실을 거뒀다. 훗가이도 다이세쓰산 국립공원 인근의 주민과 환경단체가 터널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다이세쓰산에 서식하는 '우는 토끼'를 원고로 내세운 소송이 제기된 지 30년 만인 99년 3월 승소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터널공사로부터 서식지를 지켜낸 '우는 토끼'

▲ 터널공사로부터 서식지를 지켜낸 '우는 토끼'



이처럼 외국의 경우 자연의 권리 주체성을 인정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난개발에 제동을 건 판례들이 미약하나마 축적되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자연의 권리 주장에 대해 매우 인색하다. 도룡뇽 소송에 대해 1심 재판부는 2004년 4월 "자연물인 도룡뇽 또는 그를 포함한 자연 그 자체에 대하여는 현행법의 해석상 당사자 능력을 인정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다"며 소송을 각하했고, 2004년 11월 항소심 재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98년 3월에도 녹색연합이 낙동강 재두루미의 떼죽음과 관련해 재두루미를 원고로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 부적격 결정이 나온 바 있다.


자연의 권리를 주장하는 이유

이처럼 자연의 권리 주체성을 둘러싸고 판례들이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지만, 자연의 권리 주장이 던지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자연의 권리 주장은 기존의 환경 관련 법률이 생물 다양성이나 생태계의 보전에는 무게를 두지 않는 인간 중심성에 기초해 있다는 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196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인권으로 발전해온 환경권 개념은 특정 개발사업이 인간의 재산권이나 생명권, 건강권 등에 직접적 피해를 양산할 경우 인간을 보호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연을 보호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이 보호를 요청하지 않는 한 자연 자체를 보전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연 보호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자연에도 현재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생존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이 개발정책의 결정과 재판의 기준이 될 때만이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자연의 권리는 가능한가

이러한 의미를 인정하더라도 자연의 권리가 현행 법체계 내에서 받아들여지기까지에는 상당한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자연의 권리를 옹호하는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사람이 아닌 다국적기업들이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얼마나 많은 전세계 자연을 효과적으로 파괴, 약탈하고 있느냐고. 그렇다면 왜 자연은 인간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자신을 변호하고 방어할 수 없느냐고.

이어서 말한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가치를 승인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존엄이라는 가치를 승인하는 것이라고. 자연은 인간 밖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하는 것인 동시에 인간과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멸종위기에 놓인 도롱뇽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초록의 공명 운동 [출처] http://www.cheonsung.com<br />

▲ 멸종위기에 놓인 도롱뇽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린 초록의 공명 운동 [출처] http://www.cheonsung.com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가진 의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연의 권리 주장은 또 다른 근본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자연'과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 사이의 법적 다툼은 사실 '침묵하는 자연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려는 인간' 사이의 싸움이 아니냐는 것이다. 자연의 권리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해서만 주장될 수 있고 또 자연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인간에 의해서만 대행될 수 있는 것이라면, 기존의 인권 개념을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편이 자연의 권리 주체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시간을 소모하는 것보다 나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발전권을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대부분의 생태 파괴가 '발전'을 내세운 개발과정에서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발전권은 발전의 과정에 참여할 권리(자기결정권)를 권리의 핵심 내용으로 규정하고 있는 만큼, 어떤 발전을 추구할 것인지를 선택하는 초기단계에서부터 자연의 독자적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인간중심적 발전권에서 생태주의적 발전권으로

발전권은 '개인과 집단이 참여한 가운데 발전의 방향을 선택하고 발전의 혜택을 향유할 권리'를 의미한다. 1986년 유엔총회에서 선언된 발전권은 애초 국제경제질서의 불평등, 인간의 포괄적 발전을 무시한 경제성장 위주의 개발정책, 발전과정에서 배제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차별 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싹튼 권리개념이었다. 그래서인지 발전권 선언 어디에도 자연의 독자적 가치에 대한 존중을 명시한 조항은 찾아보기 힘들다.

비록 1992년 리우선언과 이듬해 비엔나 세계인권회의 선언 등을 통해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이 주창되면서 발전권 개념의 일정한 전환이 시도되기는 했다. 하지만,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도 현세대와 미래세대의 정의를 중심으로 정의되었을 뿐, 인간과 다른 생물종 사이의 불평등 문제는 적극적으로 다루어지지 못했다.

그동안 자연의 가치를 등한시한 인간의 오만은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의 감소 등 생태위기의 심화와 인류 생존의 위협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낳아 왔다. 그러하기에 기존의 발전권 개념이 가진 인간중심성을 반성하고, 인간중심주의로부터 생태주의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발전권의 주체는 여전히 개인과 집단일 것이고, 발전의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도 결국은 인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발전은 인간의 복지 향상만을 꾀하는 것이어서는 안되며, 다른 생명체의 존엄과 자연과의 공존을 함께 꾀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인간의 지속가능성만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일부로서 자리잡고 있는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럴 때만이 발전의 혜택도 고루 돌아갈 수 있다. 생태파괴의 1차적 피해가 가난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회적 약자들에게서부터 나타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갯벌의 생명과 지역주민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함께 요구했던 새만금 투쟁, 도룡뇽의 독자적 가치를 주장했던 천성산 투쟁이 제기하고 있는 도전을 인권운동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기존의 인권체계 내에 생태주의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