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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인권하루소식 '그때 그 사건' ④ 96년 연세대 사태

공포의 아수라장, 국가폭력이 남긴 오랜 상처

5,500여명이 검거되고 482명이 구속된 96년 연세대 사태를 당시 언론은 "도심의 난동"이라 명명했다. 96년 전국을 들끓게 했던 "난동"은 왜 누가 일으켰으며, 어떤 문제를 남겼을까?


연대 사태는 공안 기획의 산물

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병언 씨(31)는 "연세대 사태는 96년초부터 일관된 김영삼 정권의 공안정국 기획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그 주장의 근거로 96년 개학부터 개시된 경찰의 강경한 시위 진압에 주목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3월 29일, 전경들의 폭압적 진압으로 사망한 노수석 씨 사건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초부터 팽팽하게 맞섰던 학생과 당국간의 대결분위기는 8월 들어 당국이 8.15행사 불허 방침을 밝히고 한총련 지도부가 장소변경 불가로 맞불을 놓으면서 비등점에 이르렀고, 한총련이 8.15 행사후 해산의사를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봉쇄 조치를 계속하면서 위기 국면으로 돌입했다. 15일 당국은 "시위 참가 학생 전원을 연행하여 의법조치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실제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당시 충청총련 의장이었던 설중호 씨는 "오죽했으면 학생들이 '집에 가고 싶다'고 외쳤겠나"고 반문한다. 설 씨는 "아무런 준비 없이 경찰의 봉쇄에 떠밀린 농성을 하다 보니 먹을 것, 마실 것도 부족했고, 여학우들의 경우 생리대마저 부족해 천을 뜯어서 대용하는 형편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박 씨는 특히 농성 3일째인 17일을 잊지 못한다. "경찰측에서 서문을 열 테니 빠져나가라는 연락이 와서 학우들이 환성을 지르고, 서로 환한 표정으로 학생식당으로 가서 3일만에 배를 채우려는 데 경찰이 치고 들어왔다"는 것. 이 전격적인 진압작전에 의해 농성 중이던 학생들은 둘로 쪼개져 이과대와 종합관으로 밀려들어갔다.

이과대쪽에 있던 박 씨에 따르면 17일 밤 이후 "직격 최루탄이 창문을 부수고 조명탄이 하늘을 밝히는 등 공포분위기에서 안에 갇힌 학생들 중 일부는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소동을 부렸고 친구들이 말리는 등 극도로 어수선했다". 최후의 진압작전이 벌어진 20일 종합관 진압작전은 설 씨의 표현에 따르면 "불붙은 바리케이드, 자욱한 연기, 그리고 전경들의 무차별 구타와 욕설" 그 자체였다.


가능한 모든 인권침해 저질러졌다

21일 "쑥대밭이 된 종합관"으로 일단락된 연세대 사태는 그 규모만큼이나 공권력이 국민 개개인에게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인권침해를 망라하고 있다. 검문과 연행, 진압과정에서의 폭행과 폭언, 조사과정에서의 고문과 가혹한 처우, 증거조작에 쓸 연출사진은 물론이고, 그 해 정기국회에서 추미애 의원이 폭로했듯 여학생에 대한 검거와 조사 과정에서 빈번하게 행해졌던 성추행과 성폭언까지…. 하나하나 따지는 게 부질없어 보일 만큼 짧은 시간에 압축적으로, 가능한 모든 침해행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공안광풍 속에 진실은 묻혀졌고, 성추행 혐의로 고발된 전경들은 불기소처분이란 면죄부를 받았다.


'한총련=좌경'이 면죄부 부여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보다도 한총련에 대한 색깔 입히기, 마녀사냥이 먹혀 든 데서 찾아야 한다. "한총련은 좌경"이란 말은 그 말을 하는 자와 듣는 이 모두에게 고유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경찰은 한총련이 좌경이고 불온하므로 함부로 다루어도 된다고 말했고, 평범한 국민들은 한총련이 무권리 상태로 방치되는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공감 아닌 공감'을 강요당했다. 사상을 이유로 한 집단이 자신들의 전 존재를 부정당해도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총련을 이해하자고 나서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마저 덧칠될 것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렇듯 한총련을 매도하는 목소리는 여론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상을 차별하는 구조 위에서 관철되는 권력의 횡포, 소수자를 향해 퍼부어지는 강자의 폭력이라 불러 마땅했다.

한편으로는 검거자 5,500여명으로 상징되는 사건의 규모 자체도 일정한 역할도 했다. 큰 규모가 필연적으로 인권침해를 불러왔듯, 바로 그 규모의 거대성 자체가 사안이 중대하다는 인상을 심어주어, 경찰이 농성진압과 조사 과정에서 저지른 인권침해를 '사소한 것'들로 치부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소소한 침해는 불가피했다"는 궤변마저 정당화시켰다. 연대사태가 남긴 큰 문제 중 하나는 '크게 사고 치면 단죄할 수 없다'는 현실적 주장이 사회적으로 다시 한번 확인된 데 있다.

이에 대해 설 씨는 "악한 것은 악한 것이지, 그 규모에 따라 악행이 선별적으로 용인될 수는 없다"고 논박한다. 소소한 것들은 단죄되면서도 크게 사고쳤다 해서 그냥 넘어간다면, 우리 사회에서 국민을 상대로 큰 악행을 저지르기 쉬운 자들, 곧 공안세력은 사건을 칠 때마다 크게 저지르고픈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공안검찰 공화국으로의 전환

연세대 사태와 관련해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공안기구들이다. 이전시대 '사찰정치'의 주역이 정보기관이었다면, 문민시대 '공안정치'의 주역은 검찰이다. 박병언 씨는 "연세대 사태를 기획하고 뒤처리한 주역은 공안검찰"이라 지적한다. 이후 공안검찰은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을 계기로 정국을 장악하고, 97년 한총련 이적규정을 주도하면서 좌익사범합동수사본부로 확대 개편되면서 전성기를 구가한다.

연세대 사태가 일어난 지 벌써 7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날 연세대에서 '공권력의 만행'을 경험한 개인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그들에게 있어 "국가가 한 개인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갔을 때의 절망감"이란 떨치기 힘든 "악몽 그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