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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진보의련' 사건을 보면 국가보안법이 보인다 ③

전 국민을 알아서 기게 만든다

국가보안법의 폐해는 혐의 당사자가 치르는 연행과 구속의 고통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빨갱이' 낙인이 찍힌 당사자는 사건이 종결된 후에도 당시 기억이 족쇄가 되어 수시로 자신을 '검열'하게 되며, 일반 국민들도 국가보안법이 '빨갱이'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게 된다. 공안당국은 이런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과시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하여 반대자들을 탄압해 왔다.


'자기검열'이라는 족쇄

"연행된 후에는 인터넷에 간단한 글을 써도 익명으로 써야 안심이 되고 사회주의·자본·노동 같은 말은 당시 기억 때문에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됐다." 2001년 10월, 진보의련 가입혐의로 연행됐다 풀려난 김미혜 씨의 말이다. 사건 이후, 한동안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그녀는 "국민을 알아서 기게 만드는 국가보안법이 제 할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94년 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기소된 경상대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의 저자 장상환 교수도 "사건 이후, 동료 교수들이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할 수밖에 없어, 원고를 완성한 상태에서 출판을 보류하기도 했다"며 "94년 개정판 이후 7년이 지난 2001년에야 교재의 개정판을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국보 칼날 어디든 겨눈다

진보의련 사건을 통해 공안당국은 의료계에도 '빨갱이들이 숨어있다'는 공포심을 자극하면서, 어디든 국가보안법의 칼날이 적용될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를 했다. 3년 전 "북한의 전위조직이자 지하혁명당"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 했던 소위 2차 민족민주혁명당(아래 민혁당) 사건의 경우는 '교육계'에 대한 경고가 됐다. 이화외고 과학교사 박정훈 씨는 민혁당 조직원으로 고등학생들에게 주체사상을 전파했다는 혐의를 받아 구속됐다. 박 씨는 "당시 공안당국과 언론은 '주사파 조직이 고등학교까지 손을 뻗쳤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공안당국에게 사망선고로 받아들여졌을 '6.15 선언'과 예산이 결정되는 9월 정기국회 사이에 사건이 터졌다"며 "자신들의 입지가 줄어들 때마다 사건을 기획, 조작하는 것이 공안당국의 생리"라고 말했다. 결국 박 씨는 노동신문 사설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았다는 '이적표현물 소지' 혐의만 인정돼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공안당국은 '교육계에도 빨갱이들이 숨어있다'는 식의 공포를 충분히 자극할 수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이 고3 여고생까지 참고인으로 소환해 주체사상 교육을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한 것 역시 그러한 공포를 자극하는 주요 기제였던 셈이다.


'빨갱이 낙인', 기득권 입지 강화에 특효

또한 국가보안법에 의한 '빨갱이' 낙인은 자연히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입지를 강화해주는 기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번 진보의련 판결이 나온 뒤에도 그간 진보적 보건의료단체들이 주장해온 공공의료 강화 주장에 빨갱이 낙인을 찍으려는 시도가 있었다. 의약분업 문제 등 보건의료정책에서 진보적 목소리와 대립해 온 이익단체들이 판결에 일제히 환영의 뜻을 밝힌 것.

대한개원의협의회는 성명서에서 "적색사상에 젖어있는 좌파인사들이 주로 해 온 현재의 의약분업을 전면 재개편하여 새 틀을 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의사협회도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는 자유민주주의적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해야 하며 이에 반하는 정책과 주의를 철저히 반대한다"며 재판부 판결을 이용해 의료 공공성 강화 주장을 공격했다.


폐지 주장마저 금지 대상?

이렇듯 국가보안법의 폐해는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에조차 재갈을 물리는 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지난 5월 13일 대법원(주심 대법관 박재윤)이 국가보안법 폐지주장을 담은 현수막을 내거는 것조차 금지하는 판결을 내놓은 것이 대표적.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과격하고 선동적인 문구로 표현되어 게재된 현수막을 불특정 다수의 시민들이 통행하는 장소에 게시하고자 하는 것은…억제의 필요성과 공익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창호 교수(경상대 법대)는 "재판부가 수호하고자 하는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인데, 주장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재판부의 자기 모순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