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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논평> 의문의 죽음, 이젠 차별 없이 밝혀져야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던 등불이 꺼졌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시한이 지난 16일로 끝나버렸다. 22개월 동안 위원회는 국가권력이 유린한 생명과 은폐된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박영두, 최종길, 김준배, 인혁당 사건, 허원근… 중앙정보부, 군, 경찰, 교도소 등의 폭력과 고문, 조직적인 사건은폐의 조각이 드러날 때마다 국민들은 진실에 눈을 떴고 국가권력이 저지른 악행에 소스라쳤다. 그러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미약한 조사권한은 막강한 권력으로 무장한 기관의 입을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총 83건의 조사대상 중 김성수, 박창수, 이철규, 장준하 사건 등 30건에 최종적으로 진상규명 '불능' 딱지가 붙게됐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권한을 강화하고 활동시한을 연장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또 하나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으로 한정짓고 있는 의문사의 대상을 확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치 죽음에도 경중이 있는 양 의문사의 개념을 협소화한 것은 과거청산의 범위를 스스로 한계짓는 일이었다. 군이 조직적으로 죽음의 진실을 조작·은폐했음이 밝혀져 국민을 분노케 했던 허원근 일병 사건. 지금 그 사건은 33건의 '기각' 리스트에 올라있다.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로 죽은 건 맞지만 민주화운동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란다. 죽음에 대한 차별이 아닐 수 없다. 죽은 자의 명예가 회복되긴 커녕 '기각'이라는 판정 아래 망자와 유족들은 다시 한번 상처를 입게 된 셈이다.

허 일병 사건은 그나마 진실이라도 밝혀졌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또다른 수많은 주검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성'의 벽 앞에서 진실규명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한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관련성'이란 올가미는 위원회의 '양심'마저 뒤흔들었다. 위원회는 73년에서 76년 사이 전향강요를 거부하다 사망한 최석기·박융서·손윤규 씨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전향을 거부한 행위만으론 민주화운동이라 인정하기에 미흡하다는 것이 위원회가 내세운 근거다.

그러나 이는 "권위주의적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만으로도 민주화 운동"이라고 인정됐던 최종길 교수 사건과 비교할 때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의 사회주의 사상이 상반된 결정의 근거라면 그것은 위원회 스스로 레드 컴플렉스와 사상검열의 벽 앞에 무릎꿇은 비겁한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어렵사리 밝혀진 죽음의 진실마저도 '민주화운동과의 관련성'이란 모호한 기준 때문에 희석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죽음의 가치가 매겨지고 진실규명의 기회조차 제한되는 일은 '민주화된' 사회에선 있어선 안 될 일이다.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했든 숨죽이고 있었든, 무슨 사상을 품었던 간에 공권력에 의한 모든 죽음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권한강화와 기간연장, 그리고 의문사 범위의 확대. 이상이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개정의 골자여야 한다.

진실을 향한 등불을 다시 밝혀라. 그리고 골고루 비추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