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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제58차 유엔인권위 소식 (9) 제58차 유엔인권위, 파행 끝에 막내려

이스라엘, 유엔인권위 특별조사단 입국 거부

제58차 유엔인권위가 6주간의 모든 일정을 마쳤다. 김철효 씨가 유엔인권위를 최종 결산하는 소식을 제네바에서 보내와, 이틀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주>

지난 달 26일 제네바 유엔유럽본부에서는 제58차 유엔인권위원회 본회의가 파행으로 얼룩진 가운데 막을 내렸다. 이번 회의는 파행적 운영과 논의의 정치화로 사상 '최악의 회의'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6주간 라말라, 예닌 등 팔레스타인 주요지역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과 팔레스타인 자살폭탄 사건들이 국제뉴스를 뒤덮는 동안 인권위에서도 이에 관련한 논쟁이 압도했다. 한 통계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인권상황에 관한 논쟁이 전체회기의 50%가 넘는 시간을 차지했다고 한다. 결국 특별회의를 거쳐 메리 로빈슨 인권고등판무관을 주축으로 하는 특별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의안을 이미 통과시켰으나 이스라엘의 비자발급 거부로 결국 무산되었다. 회의 마지막 날까지 계속된 격론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공격을 비판하고 인권고등판무관의 조사단 방문을 촉구하는 결의안(E/CN.4/2002/L.116)을 파키스탄 주도로 통과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9.11 사태이후 테러방지조치를 이유로 자행되는 인권침해도 이번 유엔인권위의 주된 초점 중 하나였다. 코피 아난 유엔사무총장, 인권고등판무관은 수차례 각국 정부의 관심을 촉구하고, 유엔인권위가 관련된 특별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제앰네스티, 휴먼라이츠워치, 민변 등 민간단체들도 각국의 테러방지법안이 몰고 오는 기본적 인권의 침해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반복했다.


멕시코, 대테러조치에 따른 인권침해 방지 결의안 철회

인권단체들의 노력으로 대테러조치에 따른 인권침해의 방지에 관한 결의안(E/CN.4/2002/L.110)이 제출됐으나, 마지막 날 제안국 멕시코가 스스로 결의안을 철회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프랑스 등 일부국가와 대다수 민간단체들이 강한 불만을 표출했으나, 철회의 배후에는 미국의 압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편 이번 유엔인권위원회는 파행적 운영이 극에 달한 회의였다. 재정문제를 이유로 둘째 주부터 급작스럽게 회의시간이 절반 가까이 단축되는 바람에 회의를 정해진 기간 내에 끝낼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 되었다. 결국 발언시간 축소, 민간단체 발언 취소 등의 파행적인 조치를 통해 회의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으나, 회기 내내 일정이 뒤죽박죽되는 바람에 각 주제에 대한 정상적인 논의는 아예 불가능했다.

특히 논의의 가장 중심이 돼야 할 주제별․국가별 인권상황에 대한 특별보고관의 보고는 형식적으로 진행되거나, 아예 특별보고관의 발언거부로 취소됐다.


회기 내내 "회의는 끝나야 한다"?

이러한 회의시간단축과 파행운영을 가장 환영하는 회의 참가자들은 당연 정부대표들이었다. 한편 폴란드 출신 야쿠보르스키 의장은 회기 내내 회의의 내용에는 관심도 없이 '회의는 끝나야 한다'고만 반복하다가, 마지막 날 하루종일 '자, 이제 다 끝나갑니다'라고 반복해 주위의 실소를 자아냈다.

파행 운행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물론 민간단체였다. 회의 초반부터 사우디 아라비아와 파키스탄 등 이슬람국가들과 중국, 수단, 말레이시아 등 이른바 '비슷한 의사를 가진 그룹 (LMG)'의 주도로 민간단체의 활동에 대해 강하게 압력이 가해지는 가운데, 발언시간 축소에 더해 심지어 아예 '발언봉쇄'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어렵게 제네바까지 온 제3세계 민간단체에게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각국 정부에 대한 비난이 가장 활발했던 '각국의 인권상황'에 관한 의제에서 민간단체의 발언이 취소됐던 것이다.


민간단체 참여권 제한, 제도화 우려

하지만 연대 형성의 실패로 민간단체들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일부 전문가들은 민간단체의 참여권 제한이 앞으로 '제도화'될 거라는 데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어용 민간단체(Government Organised NGO)들의 전횡이 갈수록 심해져 민간단체 사회의 신뢰성을 위협하는 현상도 보였다. 특히 인도와 파키스탄의 정부에서 지원 받아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많은 단체들은 자무-카쉬미르 분쟁지역에 관한 발언에서 자국정부를 옹호하는 발언을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단체 간에 서로 비난하는 꼴불견을 보였다. 또한 일부 중국 단체들은 자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는 찬양일변도로 일관하는 반면, 파룬공 신도들을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이러한 단체들이 정부가 민간단체 참여를 제한하게끔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올해 들어 유엔인권위에서는 '인권논의의 정치화'와 패거리투표가 어느 해에 비해 두드러졌다고 평가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에 관한 논쟁이 뚜렷한 성과도 없이 계속 반복됨으로써 실제로 다른 국가와 주제에 관한 논의는 극심하게 주변화된 것이다. 유엔 회의는 원래 지역적으로 분배된 5개의 '지역블록'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와는 상관없이 파키스탄이 주도한 '이슬람국가회의(OIC)'와 '비슷한 의사를 가진 그룹(LMG)' 등 그 법적실체가 불분명한 인권후진국 집단들이 모든 논의를 정치적으로 내몰았다. 이들 집단은 짐바브웨, 적도기니, 체첸, 중국 등의 인권상황에 관련, 사형제도, 성적지향성 관련 내용을 담은 결의안 등을 원천봉쇄 하는 등 패거리투표로 실력행사를 했다. 이들 결의안에 대한 표결과정에서 국가 간 표거래가 심각하게 오고 갔다고도 알려지고 있다.

이번 인권위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이 회원국에서 탈락한 채 진행된 회의였다. 미국은 예년까지 중요한 결의안에 대해 줄곧 트집을 잡았던 데 비해, 올해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미국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고 짧게 밝혔을 뿐 거의 활동이 없었다. 하지만 과테말라가 미국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나섰으며, 캐나다와 영국도 비슷한 입장을 보여 주위의 비난을 샀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수많은 논의와 결의안 표결 과정의 배후에서 압력을 행사해 왔다고 분석되고 있다.


특별보고관 "상시방문허용"해야

유엔인권위의 파행적 운영과 정치화를 지켜보며 주요 민간단체들은 유엔인권위 회원국의 자질에 대해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휴먼라이츠워치, 국제법률가위원회(ICJ), 국제인권연맹(FIDH) 등 이른바 주요 인권 단체들은 공동 발언문에서 '유엔인권위 회원국이라면 스스로 지명한 특별보고관이 자유로운 방문을 허용하는 "상시방문허용 제도"를 도입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 일본, 중국, 쿠바, 콩고민주공화국, 사우디 아라비아, 수단 등 회원국 중 이 제도를 도입하지 않은 35개국을 열거하면서 비난을 가했다. 한편 53개 회원국 중 상당수가 주요 6개 국제인권협약에도 가입하지 않았거나, 보고서제출 등 가입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어 '유엔인권위 회원국에 대한 자격조건이 마련돼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의사결정 투명성 문제제기

뿐만 아니라 의사결정의 투명성에 대해서도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별보고관의 국가별 혹은 주제별 상황보고와 정부대표와 민간단체 대표의 일반토론을 거쳐서 관련된 결의안이 마련되고 표결에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회의진행의 순서이다.

그러나 실제 결의안은 정부대표간에 비공개회의로 이미 결정된 상태에서, 특별보고관과 일반토론이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비정상적 유엔인권위의 회의진행에 대해 한 민간단체 대표는 '유엔인권위에 심각한 회의를 느낀다'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