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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필리핀 인권기행 ③ (끝)

가난과의 전쟁, 전쟁 속의 가난


마닐라 시내에서 차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쓰레기산'은 필리핀 가난의 상징이다. 마닐라 곳곳의 도시에서 모여드는 쓰레기로 산이 만들어진 빠야타스에는 쓰레기를 뒤져 폐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2000년 여름, 많은 비로 인해 쓰레기 더미가 무너져 인명피해가 났는데 빠야타스는 그 일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빠야타스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미카엘 신부는 "사고 이후 정부가 쓰레기 산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주민들을 이주시켰는데, 주민들이 쓰레기를 찾아 다시 쓰레기산 밑으로 집을 옮기고 있다"며, 여전히 7만이 넘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쓰레기산 주변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쓰레기 더미 속의 삶

지난 달 23일에 방문한 빠야타스의 한 집은 쓰레기 차가 오가는 큰 도로 변에 있었다. 도로라고는 하지만 그 또한 쓰레기가 쌓인 커다랗고 평평한 둑이었다. 방문했던 집에는 텔레비전과 냉장고가 있었는데 빠야타스 사람들에게는 이것들이 저축의 일종이라고 미카엘 신부는 설명했다. 1㎏에 4페소(약 100원)하는 폐지나 철사, 구리 등을 모아서 전자제품과 귀금속을 사 모으는 이들은 집안에 다급한 일이 생기면 전자제품과 귀금속을 전당포에 맡긴다는 것이다.

쓰레기장 곳곳에는 고무호스를 불에 태우는 아이들이 모여 있었는데, 검은 연기를 피하기 위해 겉옷을 머리까지 뒤집어 쓴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도 눈만 내놓은 채, 불을 피우며 고무호스 안쪽에 붙어 있는 쇠붙이를 모으고 있었다. 마을병원 자원활동가는 이 지역에 결핵과 간염, 피부병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카엘 신부는 "지난 크리스마스 때 이 곳에서 3명이 살해됐지만 피해자만 있을 뿐 그것으로 그만"이라며 빠야타스의 또 다른 문제를 풀어놨다. 그는 "가족이 죽어도 장례 치를 비용도 없는 사람들은 사고를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고, 사건이 발생해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소송을 통해 피해를 보상받는 일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보다도 부정부패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다는 체념이 이들을 자포자기하게 하는데 한 몫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빠야타스도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의 땅이다. 직업도 없고,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쓰레기 산에 비정규학교와 유치원을 만들고, 공동작업 공간을 만들어 가내수공업을 하며 돈을 모아 집을 짓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그 곳에 있는 것이다. 많은 민간단체와 정치조직, 종교단체들이 빠야타스에서 활동하면서 주민들의 자활을 위한 저축모임, 교육활동 등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비록 2000년에 있었던 붕괴사고 이후, 자기 선전을 위한 정치인들의 방문과 경제적 지원을 찾아 줄을 서는 주민들로 혼란을 겪고 있지만, 빠야타스는 아직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이 살아 있는 곳이었다.


빈곤보다 무서운 전쟁

필리핀 전체 쌀 생산량의 40%, 옥수수의 60%, 파인애플과 천연고무 90%이상이 생산되는 곳 민다나오. 그러나 민다나오 섬은 필리핀에서 또 하나의 빈곤의 상징, 인권침해의 상징이었다.

난민을 위한 종교단체인 ECDFC에서 일하고 있는 욜은 "대부분의 농가가 농사지을 땅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하루 50페소(1300원)정도의 저임금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민다나오 경제상황을 설명했다. 또한 "나이어린 아이들도 광산 일과 운송 일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거리에는 9-10세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자전거를 개조해 사람을 실어 나르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민다나오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협하는 더 큰 문제는 힘든 노동과 굶주림이 아니라 정부군과 필리핀 이슬람혁명전선(MILF)과의 전쟁이었다.

올 2월 8일 민다나오의 서쪽 코따바토시를 방문했을 때 시내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서너 채의 집은 부서진 채 기둥만 남아 있었다. ECDFC의 루즈는 "두 달 전에 정부군과 반군의 싸움으로 파괴된 집"이라며 흔적만 남아 있는 집들을 가리켰다. 이처럼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민다나오에서 활동하는 민간단체들은 평화정착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코따바토 시내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한 교회에서는 '평화구역'을 만들어 정부군과 필리핀이슬람혁명전선이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1년 전부터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 평화지역에서 살도록 하는 한편, 해외지원을 얻어 기초생활 시설을 갖추고, 주민들을 교육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구역을 맡고 있는 로베르토 신부는 평화지역의 사례는 민다나오에서 성공적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아직은 하나뿐인 예에 불과하다"며, 민다나오에서 계속되는 전쟁위협을 이야기했다. 평화를 위한 민간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끊이지 않는 전쟁의 위협은 아이들을 위한 교육도,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생계를 위한 일자리도 여전히 불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인간다운 삶과 평화를 되찾기 위해 이슬람 반정부군과 정부군을 마다하지 않고 민다나오를 찾아오는 인권운동가들은 전쟁의 위협과 굶주림 속에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다. 그리고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산 속 마을 아이들을 위해 산에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과 교육을 위해 쓰레기 산에 사는 활동가들 역시 작지만 필리핀을 변화시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힘겨운 그들의 싸움이 결실을 맺어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