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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하루소식

류은숙의 인권이야기

산타클로스라야 줄 수 있는 선물?


심장병에 걸린 어린 딸아이가 있다.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다는 걸 아버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난하다. 청소부 리어카를 끌고 아버지가 일 나가면 숨차서 뛰어 놀지도 못하는 병아리처럼 여린 아이는 양지바른 담벽에 기대어 다른 아이들이 노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버지가 돌아와 마주앉은 저녁상에는 콩자반과 김치 뿐, ‘얼마 남지 않은 딸의 생애동안 맛있는 것조차 맘껏 사줄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진다’는 해설과 함께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클로즈업 된다.

이런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TV에서 보고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벽을 보고 며칠을 혼자 울었다. 험한 인생살이에 대한 두려움, 그 아이에 대한 연민, 내 부모님의 형편과 나의 처지가 겹쳐져서 촉발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제정 53주년이자 ‘인권의 날’을 맞아 소위 인권운동가인 나는 연이은 인터뷰로 하루를 보내야 했다. 언론사는 달라도 질문은 비슷했다.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 않습니까?”로 시작되어 “인권 문제의 양상이 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로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앞의 질문은 우리 사회의 풍요와 각종 제도의 변화를, 뒤의 질문은 국가기관의 폭력에 대한 문제제기보다는 사회권 보장의 문제로 인권문제에 대한 인식과 주장이 변화․확대되었다는 걸 염두에 둔 것이었다.

정말 세상이 좋아졌다면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 가는 딸을 바라만 봐야 하는 아버지는 사라졌을까? 초국적 제약회사의 횡포로 치료약을 제대로 쓸 수 없는 백혈병 환자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보장(?)해주는 월 26만의 생계비로 살아야 하는 중증장애인 여성, 노동조합의 결성과 단체행동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수많은 비정규노동자 등을 떠올리면 말문이 확 막히는 질문들이었다.

세계인권선언을 기초할 당시,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 노동에 관한 권리, 정기적인 유급휴가를 포함한 휴식과 여가의 권리, 충분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선언에 넣기 위한 노력은 많은 산을 넘어야 했었다. 많은 정부가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편적 인권에 포함시키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선언의 기초자 중 한사람이 ‘있던 권리를 빼는 일은 쉽겠지만 없던 권리를 나중에 새로 넣는 일은 아주 어려울 것’이라며 사회권의 삽입을 위해 버텼다는 후문이 있다. 많은 정부가 사회권에 대해 끼고 있는 팔짱을 풀지 않으려 하고, 사회권의 보장은 국가의 의무가 아니라 ‘산타클로스라야 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기도 한다. 사회권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정부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때라야 세계인권선언의 의미는 점선이 아닌 실선으로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류은숙은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입니다.)